김동인의 친일 소설이다. 덕천가강(德川家康 ― トクガワ イヘヤス)이 풍신(豊臣) 정부를 꺼꾸러뜨리고 ‘에도(江戶)’에 막부(幕府)를 연 지도 어언간 삼백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한 개의 정치 생명(政治生命)은 삼백 년을 그 장기(長期)로 한다. 삼백년이면 한 정치생명은 이미 늙어서 다른 새롭고 싱싱한 정치의 출현을 기다린다. 한(漢)이 전한(前漢)과 동한(東漢)을 합하여 사백 년 당(唐)이 삼백 년 명(明)이 또한 겨우 삼백 년 ― 이것이 정치 생명의 긴 자〔長者〕들이다. 지금 삼백 년 가까운 정치 생명을 누려 온 자가 지나에는 애신각라 씨의 청(淸)이 있고 동방에는 덕천막부가 있다. 하늘의 법칙은 여기도 움직이어 청(淸)은 아편 문제의 영국 대포 한 방으로 그 사직의 경중(輕重)이 이미 저울질받았으며 ‘덕천’막부 역시 삼백 년 안일의 꿈은 밖으로는 아메리카의 페리 제독(提督)의 인솔한 함대의 위협과 안으로는 차차 존황심(尊皇心)에 눈뜬 지사들의 움직임으로 그 존재의 흔들림을 보기 시작하였다. ‘덕천’막부는 자기 생명의 존속을 유지하기 위하여 어떤 대책을 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때의 막부의 대로(大老 ― 총리대신 격) 이이 나오스케(イイ ナホスケ·井伊直弼[정이 직필])에게 그의 막하 나가노(ナガノ)모가 진언한 바가 “경도(京都)조정의 공경(公卿)들의 들먹거리는 것은 마치 민요 같은 것으로 한 번 탄압하면 잦아 버릴 것이오이다. 귀찮고 성가신 것은 소위 지사(志士)들의 준동인데 ‘우메다 움삥(梅田雲濱[매전운빈]) 라이 미끼(賴三樹[뇌삼수]) 이께우찌 다이가꾸(池內大學[지내대학]) 야나가와 세이강(梁川星巖[양천성암])’ 등이 그 괴수요 ‘요시다 쇼잉(吉田松陰[길 전송음])’도 악모(惡謀)가 빼난 사람이외다.” 이러하였다. 막부에서는 곧 포리를 보내어 그 소위 괴수들을 잡아올렸다. 그런데 성암(星巖)을 잡으러 가니까. 성암은 행인지 불행인지 막부의 손에 붙잡히기 며칠 전에 칠십 세의 그의 천수(天壽)를 다하여 세상 떠났다. 막부의 손에 붙잡히기 이틀을 앞하여 칠십 세라는 그의 천수를 다하고 자기 집에서 운명한 성암은 당대의 이름 높은 시인(詩人)이었다. 그런지라 세상이 그의 죽음을 찬송하여 가로되 ‘시니(シニ?死ニ 혹은 詩ニ) 쟈우즈(上手?ジャウズ)’라 하였다. 성암을 잡으려다가 그만 염라대왕에게 빼앗긴 막부 포리들은 하릴없이 성암의 안해로 시 서 화(詩書畵)의 삼절(三絶)로 이름높은 홍란(紅蘭)여사를 잡아올렸다. 운빈(雲濱)이하의 지사들도 잡아올려 그들에게 사련(辭蓮)된 다른 지사들도 육속 잡아올렸다. 그들을 문초하매 그들의 입에서 여출일구로 나오는 말이 가로되 “우리의 수령은 양 시선(梁詩禪 ― 성암)이오.” 하는 것이었다. 과연 ‘시니(詩ニ)上手[상수]’였다. 막부의 검거가 이삼 일만 앞섰든가 성암이 이삼 일만 더 장수하였더면 그는 옥사(獄死)든가 형사(刑死)를 면치 못하였을 것이었다. 지사들이 여출일구로 ‘우리의 수령’이라 일컫는 성암 ― 그는 어떤 사람인가. 평범사(平凡社)판 ‘대백과사전(大百科事典)’의 ‘야나가와 세이강’을 찾아 보자. ‘양천성암(梁川星巖) (1789~1858) 시인. 처음의 이름은 묘(卯) 자는 무상(無象). 통칭 신십랑(新十?). 그의 사는 읍에 성강(星岡)이 있으므로. 성암(星巖)이라 호하였다. 천곡(天谷) 백봉(百峯) 노룡암(老龍庵)등의 호도 썼다. 미농국(美濃國) 안팔군(安八郡) 증근촌(曾根村) 사람으로 관정원년(寬政元年)에 났다. 일곱 살에 고향(花蹊寺)에 들어가서 자구(字句)를 대수화상(大隨和尙)에게 배웠는데 본시 명민하고 강기하여 남에게 칭찬을 받았다. 열두 살에 양친을 여의고 침식을 잊도록 슬퍼하였다. 형화(亨和) 삼 년 열다섯 살(사실은 열아홉 살)에 집을 동생에게 맡기고 학업을 닦으러 에 도(江戶)로 나와 고하정리(古賀精里) 산본북산(山本北山) 등에게 배우다가 얼마 뒤에 다시 고향에 돌아갔다가 문화(文化) 칠 년에 또 에도로 나와 산본 북산(山本北山)의 문하에 들었는데 학업이 크게 떨치고 더우기 시(詩)에는 놀라운 천품을 보였다.’ 이상이 그의 전반생이었다. 백과사전은 다시 그의 기사를 전개하여 가로되 ―당시 ‘ 대와천민(大窪天民)은 성암보다 앞서 시명(詩名)이 장안에 떨쳤는데 간다(神田) 오다마가(オタマガ) 지(池)에 강호시사(江湖詩社)를 열고 천하에 시객들을 청해 가지고 즐기는 성암도 그 축의 한 사람으로 있었다. 그후 성암은 그의 생애의 짝 홍란(紅蘭)을 맞아 천하를 우유하며 시상(詩想)을 닦기를 이십 년 천보(天保) 오년에 에도로 돌아와서 옛날의 강호시사의 자리를 찾았으나 잃어진 자취 찾을 바이 없어 그 근방의 땅을 사서 새로이 한 못을 파고 옥지음사(玉池吟社)를 열었다. 그의 명성이 떨치고 문하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홍화(弘化) 일년에 경도(京都)의 압천(鴨川)가의 압기소은(鴨沂小隱)에 옮아 운하(雲霞)를 벗하여 음영(吟?) 홀로 즐겼다. 그의 시 고아청기(古雅淸奇) 고취(高趣)하고 기품높아 세상에서는 그를 일본의 이백(李白)이라 하였다. 근세의 시인 관다산(菅茶山) 광라담창(廣瀨淡窓) 대와천민(大窪天民) 국지오산(菊地五山) 등 선배도 오히려 성암의 명성보다 눌리어 당시 글에서는 뇌산양(賴山陽)으로 마루〔宗〕를 삼고 시로는 성암을 북두(北斗)로 삼았다. 안정(安政) 오년 가을 막부 각로 간부전승(閣老 間部詮勝)막부의 명령을 받들고 양이근왕론자(攘夷勤王論者)들을 일망타진하려 할 때에 성암은 강개하여 시 이십오 편을 지어 시사를 평하고 그리고는 구월 이튿날 병으로 세상 떠났다. 나이 칠십. 근황지사들을 잡아 문초하매 모두 성암을 수령이라 하여 성암의 안해 홍 란(紅蘭)을 옥에 내렸다. 대소침산(大沼枕山) 원산운여(遠山雲如) 삼춘도(森春濤) 노송당(?松塘) 강마천강(江馬天江)등 모두 성암의 문하에서 난 사람들이다. 명치(明治) 이십사년 사월 정사위(正四位)를 추증하였다. 요컨대 백과사전도 그의 가다가끼(カタガキ ― 직함)를 ‘시인’이라 하였지 ‘지사’라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지사들은 성암을 수령이라 일컬었고 서향융성(西鄕隆盛) 길전송음(吉田松陰) 교본좌내(橋本左內) 구판현서(久坂玄瑞) 등 쟁쟁한 지사들이 모두 그의 문을 두드려 혹은 스승으로 혹은 선배로 그의 의견을 존중하였다. 그 일생을 한낱 초야의 시인으로 보낸 그에게 죽은 후에 지사로서의 욕이 돌아오려 했고 더 세월이 흐른 뒤에는 ‘순난지자’의 대우로서 정사위의 작이 추증되었다. 말하자면 칠십년 전 생애를 시인으로 보낸 그가 때때로 시사에 분개하여 써 던진 불붙는 노래가 때의 열혈의 젊은이들의 마음을 충격하여 드디어 그를 맹주로 우러르게 한 것이었고 그의 노래가 원동력의 하나이 되어 명치유신의 위업을 달성케 한 것이었다. 화조(花朝)를 찬송하고 월석(月夕)을 노래하는 당시(唐詩)에 적을 두고도 이 구각을 깨뜨리고 존황(尊皇)을 고취하며 양이(揚夷)를 외치며 시사를 통탄한 그의 노래의 힘 ― 이런 노래를 산출한 그의 정신의 힘 얼마나 세차고 위대한 것이냐. 당시인(唐詩人)의 통례에 벗어나지 못하여 성암도 숭당(崇唐)사상은 적지 않게 가졌었다. 그 위 본 성씨 도진씨를 버리고 ‘양천(梁川)’씨라 통칭한 것도 요컨대 지나식의 이름 양맹위(梁孟緯) 혹은 양시선(梁詩禪)등을 일컫기에 편리키 위해서였다. 일청전쟁 이후의 천당심(賤唐心)이 배양된 뭇 평가(評家)들은 이를 부인하기 위하여 각자각양의 설을 지어내어 그 새 성씨의 곡절을 부회(附會)하지만 이들은 한낱 억설이요 성암이 자기의 안해(역시 본시 도진(稻津)씨 경완 여사(景婉女史)를 장씨 경완(張氏景婉) 혹은 장씨 홍란(張氏紅蘭)이라 한 것으로 보아도 그의 의도한 바를 알 수 있다. 이 양성암(梁星巖)이 장경완(張景婉)을 안해로 맞은 것은 벌써 서른두 살이라는 중년의 때였다. 경완은 그때 열일곱.
9791130326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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