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의 7년』 6권은 여수 본영에서 한산도 둘포로 진을 옮긴 이순신이 군관 정사준으로 하여금 왜의 조총을 연구, 새로운 조총을 만드는 데 성공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은 굶어 죽어가는 양민들을 위해 둔전에 농사를 짓게 해달라는 장계까지 올리지만 호조의 대답은 없고 시체의 살을 베어 먹고 심지어 사람을 잡아먹었다는 소문이 횡행하는 가운데 구제소에서는 서리들이 구휼 곡식을 빼돌린다. 그야말로 나라가 생지옥이다. 명나라 총병은 왜적을 토벌하지 말라는 금토패문을 보내오고 선조는 왜적 토벌을 다그치면서 불가사의하게도 남해를 지키고 있는 이순신을 적대시한다. 선조의 심중에 야합하는 조정이 이순신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중에 이중첩자 시치다유(요시라)의 반간계(이간책)가 통함으로써 이순신은 절체절명의 칼날 위에 서게 된다.
불교적 사유가 배어 있는 글쓰기로 오랜 기간 명상적 산문과 소설을 발표해온 정찬주는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글을 쓰는 작가로 살아오던 그는 자연을 스승 삼아 진정한 '나'로 돌아가기 위해 저잣거리의 생활을 청산하고, 늘 마음속에 그리던 남도 산중에 집을 지어 들어앉았다. 샘터사에 근무한 십수 년 동안 법정스님의 책들을 십여 권 만들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도타운 사제지정을 맺었다. 스님은 작가를 재가제자로 받아들여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내렸다. 산중에 있는 듯 없는 듯 무지렁이 농부처럼 잊힌 듯 살면서 자연의 섭리를 좇아 살고자 하는 그의 바람은 솔바람으로 시비에 집착하는 귀를 씻어 불佛을 이룬다는 뜻의 '이불재(耳佛齋)'라는 집 이름에 담겨 있다.
호남이 없다면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