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년 전 여름이었다. 나는 김군과 해운대에 갔다가 이 얘기의 주인공을 만났다. 그것도 그때에 비가 오지 않아서 예정과 같이 떠났다면 나는 이 얘기의 주인공과 만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해운대에서 이틀 밤만 자고 떠나 동래 온천으로 가려던 우리는 비 때문에 하루를 연기하였다. 김군과 나는 여관 이층 방에서 비에 잠긴 바다를 바라보면서 오전중은 바둑으로 보내었다. 오정이 지나서 우중충하던 천기가 훤해지며 빗발이 걷히었다. 구름 사이로 굵은 빗발이 군데군데 흘렀다. 조각조각이 서로 겹쳐 흐르던 구름은 석양에 이르러서는 한 조각도 남기지 않고 맑게 걷히었다. 나는 김군과 같이 온천에 갔다가 붉은 빗발이 푸른 벌판에서 자취를 한걸음 두 걸음 감추일 때 온천을 나섰다. 오랜 가뭄이 남겨 주었던 텁텁한 기운은 비에 씻겨 버렸다. 석양은 눈이 부시게 맑았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시들 시들히 늘어졌던 아카시아 잎들은 어린애 눈동자처럼 반짝거렸다. 푸른 잔디와 흰 모래 깔린 저편에 굼실거리는 바다를 스쳐 오는 바람은 여느 때보다 더욱 경쾌한 맛이 있었다. 나는 석양을 안고 여관으로 향하였다. 유까다에 수건을 걸친 김군도 나의 뒤를 따라 섰다. 아까부터 들리는 단소 소리는 점점 가까이 들렸다. 길고 짧고 높고 낮게 흘러오는 그 소리는 발을 감추는 석양볕을 따라 머나먼 바다 저편 하늘가로 흘러갔다. 우리는 단소 소리가 나는 저편 나무 그늘로 갔다. 단소 부는 사람 앞에 오륙 인이 반달같이 벌려 서서 고요히 듣고 있다. 가슴에 석양을 받고 앉은 단소 부는 사람은 사람이 가고 오는 데는 아무상관 없다는 태도이었다. 깎은 지 오랜 머리는 두 귀를 덮었다. 가락을 뜯는 쇠갈고리 같은 손가락하며 땀과 먼지가 엉긴 시커먼 낯빛하며 둥긋한 이마 아래 조는 듯이 감은 눈은 푹 꺼져 들어서 험상궂게 생겼다. 한 다리는 거두고 한 다리는 뻗고 앉아서 정신없이 단소를 불던 입술에서 스르르 떼었다. 그는 눈을 떠서 돌아선 사람을 바라보았다. 눈뜨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애꾸눈인 것을 알았다. 그는 한숨을 휴 쉬더니 곁에 벗어 놓았던 군데군데 뚫어진 검은 사아지 양복저고리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흙투성이 된 누런 양복바지는 무릎이 뚫어졌다. 그는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가는 볕을 바라보더니 저편을 향하고 발을 떼었다. 그는 애꾸눈만이 아니었다. 왼편 다리까지 절었다. 나는 어디서 본 사람같이 느껴지면서도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로도 알 수 없는 째릿한 감정으로 절름절름 걸어가는 그의 뒷그림자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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