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밤 유화는 그 젊은 사나이를 집에 들여 재우니, 이때 에 든 아기가 주몽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자칭하는 젊은 해모수는 반드시 유화 를 맞으러 올 것을 약속하고 밝는 날 아침에 가버렸으나 한 달이 가고 두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그러나 뱃속에 든 주몽은 날로 자라서 유화는 웅심산 오리골(熊心山?綠谷) 그 아버지 하백(河伯)의 집에서 실행한 계집애라 하여 쫓겨 나서 태백산 앞 우발수(太伯山南優渤水)가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굳은 약속을 어기고 해모수가 유화를 찾아 오지 아니한데 는 이유가 있었다. 해모수는 해부루(解扶婁)가 내버리고 간 자리를 점령하여서 북부여 왕이 된 것이다. 나라를 세우는 일이 끝나면 해모수가 유화를 찾음직도 하건마는, 운명은 그때까지를 기다리게 아니하였다. 사냥을 나왔던 동부여 왕 금와는 유화를 보고는 놓지 아니하고 가섬벌 서울로 데리고 돌아 갔다. 이렇게 되니 유화와 해모수와의 인연은 아주 영 영 끊어진 것이었다. 뱃속에 든 아이가 누구의 씨냐고 금와왕이 물을 때에 유화 는 속이지 않고 해모수의 씨라고 대답하였다. 해모수는 금 와왕 편에서 보면 국토의 절반을 잘라서 감히 왕을 칭하는 역적이었다. 그래서 금와왕은 찼던 칼을 빼어 당장에 유화 의 배를 갈라서 그 속에 든 해모수의 씨를 죽여 버리고 싶 었으나, 칼자루를 잡았던 그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유화 부 인의 아름다움에 반한 것만도 아니었다. 막비 천명이었다. 이때에 금와왕의 칼이 한번 번뜩였다면(그것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주몽은 세상에 없었을 것이요, 따라서 그로 말미암 아 알려진 모든 일도 아니 생기고 말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때에 유화 부인의 뱃속에 들어 있던 핏덩어리 하나에서 고구려라는 큰 나라가 생기고 또 금와왕의 아들 대소(帶素) 를 죽이고 그 나라를 빼앗을 무휼(無恤)이 나올 줄을 아는 이는 없었을 것이다.
판권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