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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은 무엇인가, 조선왕조의 사문난적 윤휴 박세당 정약용, 불교학 노장학 양명학 천주학

탁양현 | e퍼플
  • 등록일2018-12-17
  • 파일포맷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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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이데올로기로서 道具的 理性과 斯文亂賊으로서 저항적 異端
현대사회에서 異端은 흔히 종교적 개념으로서 인식된다. 그러나 본래 이단은 지극히 정치적인 개념이다. 예컨대, 현재의 대한민국의 관점에서 이단이라면, 응당 主體思想이나 北韓을 의미하며, 그것을 추종하는 세력 또한 포함된다. 다만, 역사 안에서 이단에 대한 분별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역사의 흐름을 좇아, 이단이 이데올로기가 되고, 이데올로기가 이단이 되는 변화가, 자연스레 찾아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1세기 현재의 상황에서, 주체사상이나 북한이 어떤 이데올로기로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작동하는 원리가 그러하다는 의미다. 예컨대, 현대사회를 주도하고 있는 서양문명이나 정치제도는, 조선왕조 말기 대표적인 이단이었다. 그래서 天主學을 이단으로서 처단한 것은 周知의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기독교나 자유민주주의는 대한민국을 주도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그런 것이 바로 역사의 政治性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 말기에 천주학이라는 이단을 추종하던 사람들의 고통은, 결국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일 수밖에 없었다. 기존에 老莊哲學, 佛敎, 陽明學 등을 선택했던 상황 역시 그러했다.
그러니 현대사회에서 從北으로서 주체사상이나 북한을 추종한다거나, 親中이나 親美에 대한 선택 역시, 자기의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다. 다만, 生存의 利得을 목적하는 절대 다수의 서민대중으로서는, 굳이 어떤 것을 선택할 까닭은 없다. 설령 그것을 선택하여 추종한들, 역사의 수레바퀴는 쉼없이 굴러갈 것이며, 그에 따라 이데올로기와 이단은 이내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갓 外交的 레토릭 쯤으로나 인식되는, 人權, 平和, 幸福, 正義, 共存, 主體, 革命 따위의 이데올로기를 좇아, 반드시 어느 편이든 선택하고 싶다면, 그것은 역사에 대한 고찰이 전제되어야 함을 유념해야 한다. 그러한 역사적 이해가 없는 섣부른 선택은, 너무도 큰 고통을 초래할 수 있는 탓이다. 부득이한 탓에, 필자는 전통적으로 이단으로서 분별되던 학문을 주로 공부하였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그에 따른 갖은 배척을 감내해야만 한다. 이제는 그저 그러려니 한다.
조선왕조에서는 이단에 대한 비판이나 배척이 極烈했으며, 그러한 흐름은 현재에도 이어지고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性理學이나 朱子學 이외의 학문적 이데올로기를 異端으로서 배척하였다. 조선왕조에서 기득권층인 왕실과 양반사대부가 추종하는, 통치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학문 이외의 학문을, 斯文亂賊의 학문으로서 규정하고 탄압한 것이다.
이단에 대한 배척은, 非但 조선왕조만의 현상은 아니다. 저 먼 古代로부터 現代에 이르도록, 현실세계를 작동시키는 가장 유용한 動力 중 하나가 곧 異端論理이다. 이단의 개념이나 대상은, 시대와 상황을 좇아 변화되면 족하다. 그렇게 시의적절한 개념을 정립하고서, 그에 해당하는 대상을 배척하는 것이다. 반대로 먼저 그 대상을 결정하고서, 그에 상응하는 개념을 정립하는 경우도 있다.
이단에 대한 배척은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이다. 그런데 이단의 문제가 종교적인 행위로서 드러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는, 종교적 포용마저도 일단의 이단에 대한 배척이 전제됨을 반증한다.
흔히 異端(heresy)은, 어떤 종교집단의 내부에서, 正統敎理에서 크게 벗어나는 주장에 대하여, 正統主義者 側에서 부르는 배타적 호칭이다. 여기서 정통주의자는 時流를 주도하는 이데올로기를 도구로 삼는다.
근대 서양문화에서 횡행하던 도구적 이성은, 그 대표적 사례라고 할 것이다. 道具的理性(instrumentelle Vernunft)은, Max Horkheimer가 사용한 용어로서,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고, 사물의 본질을 인식하던 理性이, 이론적인 계산을 토대로, 목적에 적합한 수단을 제시하여, 인간 및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도구화되어버린 상태를 가리킨다.
본래 서구문명에서 인간존재의 이성은, 神의 역량에 버금하는 르네상스를 실현케 한 의대한 역량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갓 권력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人類史에서 이러한 현상은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다. 혁명과 같은 거대한 변화를 초래하는 이데올로기는, 애당초 절대적 진실을 주장하기 마련이다. 그러니 그것이 당최 그릇될 리 없다.
그런데 최초의 이데올로기가 권력을 얻어 세월이 흐르다보면, 恣意的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본래의 순수한 진실은 오염되어버리고, 그저 시대의 권력을 유지하고 존속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 역시 인류사에서 非一非再하다. 따라서 그러한 오염된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 그들이 대체로 異端으로서 분별된다.
흔히 世俗의 종교조직에서도, 정통적 信條에 대해, 異說을 내세워 파당을 짓는 자를 가리켜 이단이라고 부르며, 자기 편으로서 한 동아리가 아니라고 보는 것을, 異端視한다고 말한다.
이 말은, 한 종교집단의 내부에서, 옳고 그름의 대립이 있을 때, 정통파에서 쓰는 말로, 다른 종교나 종파를 가리키는 異敎와는 의미가 다르다. 그러나 宣敎者의 경우, 자기의 宗旨를 옳다고 하고, 다른 종교나 분파를 異端邪宗이라고 하는 수도 있으나, 이것은 예외적인 용법이다.
중국에서는 論語에서 처음으로 보이는 말로, 정확하지 않은 학설이라는 뜻이다. 韓愈가 불교나 도교를 이단으로서 배격한 이후, 新儒敎(朱子學)에서는 聖人의 道에서 벗어난 학설이나 가르침을 이단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래서 陽明學 左派에 철저했던 李卓吾(李贄)는, 대표적인 이단으로 몰려 옥중에서 자살하기도 했다.
李卓吾(1527~1602)는 明나라의 사상가이다. 이탁오야말로, 중국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유교적 권위에 맹종하지 않고, 자아중심의 혁신사상을 제창하였다. 금욕주의와 신분차별을 강요하는 禮敎를 부정하며, 남녀평등을 주장했다. 反儒敎的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다.
이탁오는, 1527년 10월, 명나라 泉州府 晉江縣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상업에 종사 하였는데, 元나라 때 선조들은 해상무역, 통역관 등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주원장은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문호를 닫아버렸다. 명분은 해상에 출몰하는 왜구를 막고, 북으로는 오랑캐의 침입을 막는다는 것이었지만, 중국은 세계적인 조류에서 뒤쳐지는 계기가 되었다.
무역의 길이 막히자, 李贄(李卓吾)의 집안은 가난을 면치못하게 되었다. 이지의 초명은 林載贄였으나, 장성하여 종가의 姓을 따라 李贄라고 개명했다. 별호로는 宏甫, 卓吾子, 李和尙, 禿翁, 百泉居士 등이 있다. 집안의 어려운 살림을 극복하기 위해, 여러지역을 전전하다, 관직에 나아가는 길을 선택하게 되었다.
-하략-

저자소개

그렇다면 현대사회의 이러한 이미지 조작은 어떠한가. 대한민국에서는 불과 몇 년 전에, 어느 대통령을 탄핵하는 과정에서, 최태민이라는 한국판 라스푸틴이 등장하였다. 그런데 대통령이 탄핵되고서도, 과연 최태민 이미지가 한국판 라스푸틴이었는지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어느 누구도 밝히려 하지 않으며, 굳이 밝힐 까닭도 없는 듯하다. 다만, 당시 서민대중들은, 그런 유사한 類의 gossip들을 빌미 삼아, 아주 신바람 난 듯, 손에 손에 촛불을 들고서, 열에 들떠 선동되었고, 그 결과 대통령은 탄핵되었다. 그리고서는 그저 그뿐이다. 애써 먼 과거의 역사를 회상할 것도 없이, 실로 그런 것이 정치판이며, 권력다툼인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비해 다소 나아졌다지만, 여전히 생존을 저당잡힌 채 蒙昧한 서민대중은, 그러한 권력놀음에 놀아나야만 한다. 혹시라도 다소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허망한 희망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정권이 바뀌어도, 서민대중의 고달픔은 별반 나아지지 않는다. 여하튼, 이렇게 따지자면 한이 없을 테니, 이제 체 게바라와 빠삐용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1928~1967)는, 체 게바라(Che Guevara)라는 애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공산주의 혁명가, 정치가, 의사, 저술가이자, 쿠바의 게릴라 지도자이다.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바스크에서, 아일랜드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생년월일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6월 14일로 기록되었으나, 이는 당시 보수적인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게바라의 부모가 혼전 임신을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결혼 이후의 정상적인 임신을 알리기 위하여, 1개월 늦게 출생등록을 한 것이다. 아버지 에두아르 라파엘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무신론자였던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르나 Y 죠사는, 실제 社會主義者는 아니었으나, 共産主義的 사고를 갖고 있었다.
또한 1824년에 시몬 볼리바르,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등 라틴 아메리카 해방군과 아야쿠쵸에서 싸운, 페루 부통령 호세 드 라셀나의 후예이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가정이기도 했다.

미숙아로 태어난 게바라는, 폐렴에 걸려 2살 때 심한 천식을 앓는다. 체 게바라의 부모님은, 아들의 건강을 우선시해서, 천식 치료에 좋은 환경을 찾아 몇 번이나 이사를 했다. 어렸을 때는, 경련을 동반하는 천식 발작에 위기에 빠진 적도 많았으며, 그 때마다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여 회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럭비같은 격렬한 스포츠를 사랑했으며, 발작할 때는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며, 경기에 돌아오곤 했다. 게바라의 중증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혔다. 17세의 게바라는, 194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951년에, 나이 많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를 돌아다니는 방랑여행을 경험하였다. 이 때 남미 각 나라들은, 우익 쿠데타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경험했지만, 빈부의 격차와 노동착취가 매우 심했으며, 부유층은 최상의 삶을 누리는 반면, 서민층은 극도로 빈곤한 삶을 살아야했다.
이러한 상황을 견문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타난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며, 마르크스주의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이 여행을 계기로 게바라는, 평범한 의사에서 혁명가로의 첫 의식 변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1952년에는, 볼리비아 인민운동에 참가하여, 외국자본의 유치와 산업 민영화에 반대하였다. 1953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25일만에 친구 카를로스 페레로와 함께 다시 남미 방랑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우리는, 체 게바라의 生來的 혁명가 기질을 예견할 수 있다.
그의 삶은, 철저한 집시로서 방랑자였으며, 보헤미안으로서 여행자였다. 그러한 그의 기질이, 혁명가로서의 삶을 유발하였을 것이다. 이는, 비단 게바라만의 특수한 자질인 것은 아니다. 역사에 남겨진 대부분의 偉人들이 방랑자 혹은 여행자의 기질을 지녔으며, 그러한 기질을 좇아 고독하게 살아냄은 쉬이 검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딘가에 정착하여, 지금 이대로 식의 안정을 도모하는 기질을 지닌 者라면, 애당초 개벽적 혁명의 변화를 도모할 리 없음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저 고인 물처럼 시나브로 腐敗해가는 愚民大衆을 일깨우는 역할을, 역사 속 방랑자와 여행자들이 하였음은 분명하지 않은가.

게바라는, 후안 페론의 독재정권 하에 있던 아르헨티나를 떠나, 당초 베네수엘라 구라나도를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볼리비아 혁명이 진행되는 볼리비아를 여행하면서, 그때까지 억압을 받아왔던 인디오가 해방되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여행하고, 하코보 아르벤스 그스만 시대 포프리스모(사회주의 정부) 정권 하에 있는 과테말라에 도착한다.
22세의 게바라는, 1951년, 과테말라에서 의사를 계속하다가, 조국 페루에서 쫓겨나 과테말라에 망명하고 있던,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와 만나 교감하여, 사회주의에 급속히 눈을 뜨고, 그녀와 결혼한다.
1950년 10월의 선거로 성립된 과테말라 아루벤스 정부는,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지속된 구조화된 수탈과, 오랜 독재 부패 정권에 의해 유린된 사회의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에, 미국기업(유나이티드 프루츠사)의 착취에서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고, 과테말라의 농업 자본주의 경제 확립을 위해 마야계 인디오의 복권을 시도하였다. 그래서 그때까지 착취만 당하였던 소작농에 대한 농지 분배 등, 과테말라 혁명이라 불릴 정도의 급진적인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루벤스 정권이 유나이티드 프루츠사의 사유지에 손을 쓰면서,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를 맹비난 하였다. 게바라는, 이 정부의 활동을,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라고 평했다. 그러나 군부의 배신으로, CIA가 밀어준 반정부 세력 까스띠요 아르마스에 의해 아루벤스 정부가 전복되면서(PBSUCCESS 전략), 민주 선거로 선출된 과테말라 정통 혁명정권은 붕괴된다.
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게바라는 무력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진심으로 지향하게 된다. 그 후 새로 집권한 아르마스 정권에 의해 게바라의 암살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아내 가데아와 함께, 실망과 분노를 안고서 멕시코로 망명한다.

1955년 7월, 멕시코에 망명 중인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7월 26일, 쿠바 후르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 타도를 목표로, 동료들을 인솔하고 있는 카스트로에 공감하게 된다. 게바라는 이때, 하룻밤 사이에, 反 바티스타 무장 게릴라 투쟁에 참여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의 생존자였던, 알베르트 바요 중령에 의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고, 쿠바 상륙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아내와 딸 이루디다를 멕시코에 남겨두고, 혼자서 쿠바로 향한다.
195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를 반군 지도자로 하여, 총 82명이 8인승 레저 보트 데셈바르코(그란마)에 탑승한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타서, 위생 등의 환경이 실로 열악하였다. 또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폭풍 속에 출발했기 때문에, 7일 후 12월 쿠바에 도착했을 때는, 많이 지쳤고 사기도 떨어져 있었다.
반군의 상륙 계획을 카스트로가 미리 발표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쿠바 정부에 유출되어, 반란군은 도착 직후부터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괴멸 상태가 되고 만다. 결국 살아서 도착할 수 있었던 사람은, 82명 중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루이스 크레스포, 호세 모얀, 훌리오 디아즈, 카리스트 가르시아, 카를로스 베르데무스 등 12명뿐이었다.
당시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혁명에 실패하여 감옥살이를 했었는데, 재판 당시 판사 앞에서, 역사가 나중에 나를 다시 평가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체 게바라 등의 동지들의 참여로, 다시 한번 혁명에 도전하여, 親美 성향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결국 붕괴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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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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