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夷文明의 陰陽哲學과 現代文明
東西古今을 막론하고서, 陰陽論은 인류 最古의 우주론이며 세계관이다. 동아시아 문명은, 그러한 음양의 사유방식을 좇아 역사를 꾸려왔다. 전통적인 음양의 사유방식에 결정적인 변화가 초래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 서양의 학문체계가 수용된 以後다.
그런데 서양의 사유방식이 수용된 이후에도, 여전히 현실세계에서 陰陽 개념이 가장 현저히 드러나는 부문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政治다. 祭政一致政이든, 王政이든, 民主政이든, 인류 역사에서 정치가 작동하기 시작한 이래, 정치적 권력을 중심으로 離合集散하는 상황 그 자체가, 곧 음양의 변화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론과 소론,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 여당과 야당 등의 음양론적 樣相은, 不得已한 相生相剋的 변화의 과정 안에 있음은 明若觀火다. 그런데 다만, 보수는 보수다워야 하고, 진보는 진보다워야 한다. 여타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렇지 않다면 변화다운 변화의 자연스러움을 맞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연스런 변화를 생성하지 못하면, 이내 革命, 叛亂, 政變, coup dEtat, 戰爭 따위의 부자연스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물론 그러한 인위적인 상황도 변화의 한 樣態이지만, 그러한 변화는 결코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러다보니 부자연스런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면, 응당 그에 상응하는 代價를 치르게 된다. 그러할 경우, 가진 게 많은 기득권층이나, 가진 게 별로 없는 서민대중이나, 오롯이 고통 앞에 내던짐은 매한가지다. 물론 특별한 사정에 따라, 그 고통의 정도는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陰이나 陽의 한 측면만이 獨裁的으로 부각되어, 변화가 不可한 경우도 문제이다. 예컨대, 과거 共産陣營의 국가들에서 共産黨만이 독존하던 상황이 그러하다. 이미 대부분의 국가들은 공산당 독재를 포기하고서 쇠락했다가, 개방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
그런데 북한의 경우는, 여전히 한 측면만이 독재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그 참상은 여실히 드러난다. 이는 음양의 자연스런 상생상극의 변화를 무시하고서, 白頭血統이나 勞動黨 따위를 내세워, 억지스럽게 자기의 기득권을 위한 한 측면만을 존속시키기 때문이다.
남한의 경우에도, 과거 군사독재의 체험으로써, 한 측면만이 독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억지스러운 것인가를 여실히 체험했지 않은가. 여하튼, 이러한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음양 개념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요구된다. 음양의 원리마저도 알지 못한다면, 이제 현실세계에서의 고통은, 감내하기 힘든 것이 되어버릴 수 있는 탓이다.
어쨌거나 현대사회는, 서구적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해 주도되는 시대다. 자유민주주의나 자본주의는, 그나마 음양의 자연스런 운행방식이 유사하게 작동하는 체제이다. 그래서 분명 인민민주주의나 사회주의에 비해서 여러모로 나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분명 전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本來的인 사유방식이 있다. 현실적인 생존을 도모하기 위해, 외래적인 사유방식을 추종하더라도, 자기의 근원적인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는 한, 본래적 사유방식이 삶의 저변에서 작동해야만 한다. 그러할 때, 사회는 보다 건강하고 건전할 수 있다.
만약 그러한 상황을 억지로 거부하거나 부정해버린다면, 삶의 현실 역시, 이내 억지스러운 것이 되어버린다. 특히 인간존재의 삶을 직접적으로 조작하는 정치의 현장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전통적으로 음양 개념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이론들은, 국가공동체의 향방이나 정치권력의 向背를 결정짓는 역할을 했다. 현대사회에서 비견한다면, 국가정보원, CIA, KGB, Mossad, Iilluminati, Freemason 등과 유사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것이다. 고대사회의 샤머니즘 역시 그러하다. 당시에는 샤먼이 곧 집권하기도 하였으니, 더 말할 나위 없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예컨대, 현재 일본의 수상인 아베 신조(あべしんぞう, 安倍晋三)의 경우, 헤이안 시대 중반(10세기)에, 아베(安倍) 가문이 대표적인 陰陽師 가문으로서 국가 요직에 중용되었고, 그러한 흐름은 현재의 아베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음양철학을 이해하여 운용할 줄 아는 자를 자기 편으로 삼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다보니 음양철학을 이해하게 되면, 과거, 현재, 미래에 이르는 展望을 가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근대화 과정에서, 기존의 음양철학은 惑世誣民하는 신비주의철학 쯤으로 치부되어 매장되어버렸다. 이는 다소 부득이했다지만, 실로 안타까운 노릇이다.
물론 새로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지 않으면, 당최 설 곳이 없는 법이라서, 그러한 대립과 배척의 과정이 人之常情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근대화 과정에서 유입된 서양학문과 기독교문화 등을 추종해야만 민족의 생존이 보장될 수 있었다. 그래서 생존을 빌미 삼아, 기존의 것들 중 자기와 부합되지 않는 것은, 죄다 弊習으로서 규정하고 배척해버려야 했다.
그러한 역사적 상황에는, 분명 부득이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천지자연의 흐름은 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라서, 세월이 흐른 후, 다시 그런 전통적인 철학적 사유방식에 대한 穿鑿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역시 현재의 생존을 도모키 위함이다.
과거에 생존을 위해 중국문화를 추종했듯이,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도록 생존을 위해 서양문화를 추종했지만, 生來的으로 東洋人이며 韓國人이므로, 그에 상응하는 생존적 사유방식을 추구함은 실로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래서 샤머니즘이나 음양철학에 대한 연구가 再起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분명 그리스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으며, 요하문명이나 고조선문명에 뿌리를 둠이 明若觀火이고, 그러한 문명의 기반이 된 철학사상이 샤머니즘이나 음양철학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陰陽 개념의 토대가 되는 철학사상으로서 周易은, 河圖에서 비롯되었고, 洪範은 洛書에서 비롯된 것으로 판단한다. 그리고 倉?說이나 史皇說 등이 일반적이지만, 河圖洛書로부터 문자가 비롯된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河圖는, 게재된 도면처럼 古代 伏羲氏 시대에, 黃河에서 龍馬가 지고 나온 55개의 點으로 구성된 그림이라고 하는데, 이는 복희씨가 말[馬]의 등에 박힌 점이나 얼룩을 보고서, 철학적 아이디어를 얻었음을 신화적으로 각색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들이 東西南北中으로, 1~9까지의 일정한 개수로 나뉘어 배치되어 있다. 복희씨는 上古時代의 東夷族 始祖로서 太?라거나, 東方의 天帝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상고시대는 歷史 이전인 탓에, 현재에 이르도록 그 史實性을 검증하기가 容易하지 않다. 게다가 현대에 이르러 遼河文明이나 紅山文化 등이 발굴되면서, 기존의 견해와 다른 主張도 제시되고 있다.
아울러 東夷族의 始祖라는 점에 대해서도, 현대에 이르러 중국의 東北工程이나, 대한민국의 古代史 재정립의 문제 등과 얽혀 다양한 異見들이 紛紛한 상황이다.
洛書는, 夏나라 禹王이 나라 안의 홍수를 다스렸을 때, 洛水(黃河支流)에서 나온 거북[龜]의 등껍질에 그려져 있던 그림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거북의 등에 그려진 문양을 보고서 철학적 아이디어를 얻은 것으로 판단된다.
하도와 비교해보면 그 변화된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낙서가 書經 洪範의 연원이 되었으며, ?乾, ?坤, ?震, ?巽, ?坎, ?艮, ?兌, ?離, 여덟 종류의 부호로 구성된 八卦의 법칙도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거북의 등에 그려진 낙서도 하도처럼, 1~9까지의 숫자를 점의 개수로 나타낸 것이다. 그런데 이 수들의 배열을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合하더라도, 그 합계가 항상 15로서 동일하다. 이것을 마법적인 배열이라는 의미에서 魔方陣(magic square)이라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것을 아주 귀하게 여겨 낙서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河圖는 황하에서 얻은 그림이라는 의미다. 洛書는 낙수에서 얻은 문자라는 의미다. 따라서 최초 그림의 단계로부터 문자의 단계로 진화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흔히 알려진 하도와 낙서의 이미지에는, 여러 문자와 숫자가 附記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하도와 낙서는 문자나 숫자의 실제적 활용 이전에 등장한 것이다. 따라서 인용된 도면처럼, 문자와 숫자가 없는 상태의 이미지가 가장 原形에 가까운 본디 모양이라고 할 수 있다.
주역이나 홍범은 모두 周나라 시대에 확립된 철학체계들이다. 주역이란 周나라의 易이라는 의미이고, 홍범은 기자가 주나라 무왕에게 전해주면서 홍범구주로서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주역 이전에 夏나라에는 連山易이 있었고, 商나라에는 歸藏易이 있었지만 전하지 않으며 주역만이 전해진다. 홍범의 경우도 상나라의 기자에 의해 기존의 정치철학이 홍범구주로서 정리되어 무왕에게 전해졌고, 기자는 조선에 제후로 책봉되어 홍범을 현실정치에 적용하였다.
따라서 주나라 이전에 기존의 易체계가 있었지만 주역으로서 확립되었고, 주나라 이전에 기존의 洪範체계가 있었지만 洪範九疇로서 확립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여기에 想像과 思惟가 누적되어 더욱 복잡하고 정밀한 思惟體系를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부호 이미지의 구성이, 歷史 이후 문자체계가 完備되고 숫자체계가 附加되며, 陰陽, 相生, 相剋, 五行 등의 다양한 철학적 개념이 도입되면서 더욱 심화된 철학적 체계를 정립하게 되는데, 이러한 철학적 체계의 정립 과정 자체는 큰 의미를 가진다.
조선왕조 後期 李瀷은 洪範說에서, 하도낙서의 연원에 대하여 기술한다. 이익에 따르면, 거대한 홍수가 범람하던 시대에 堯舜이 왕으로 있었고, 禹가 왕명을 받아 홍수를 다스리자, 하늘이 가상히 여겨 洪範九疇를 내려 주었으니, 九疇는 곧 洛書다.
그러면서 이익은,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홍범과 낙서의 연원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님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공자의 발언을 제시한다. 공자가 말하기를, 河水에서 圖가 나오고, 洛水에서 書가 나왔는데, 성인이 이를 본받았다고 하였으니, 하늘이 사람에게 주는 것은, 사람이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들어서 서로 전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가령, 하수에서 圖가 나오자 伏羲가 연역하여 卦를 만들었고, 낙서가 홍범이 된 것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낙서로부터 연원하여 홍범이 형성되는 과정에 대하여, 南宋의 蔡?은 書經集傳에서 각 典據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채침에 따른다면, 홍범의 실질적인 저자는 우임금이고, 기자는 그 원전의 내용을 敷衍增益한 註釋者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현재로서 이에 대해 마땅히 확증할 방법은 없다. 홍범이 焚書坑儒 이후 今文과 古文에 모두 존재함은, 秦始皇으로서도 홍범의 정치철학은 굳이 死藏시킬 까닭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조선왕조 後期 李瀷은 星湖全集에서, 홍범의 연원에 대해서 묻는 黃得甫와의 문답을 기술해 두고 있다. 이익과 황득보의 문답 역시, 原作者와 註釋者의 여부, 금문과 고문의 여부 등을 문제 삼는다.
이에 대해서는 이익의 주장처럼, 낙서로부터 홍범이 구성되는 시기에는 문자가 본격적으로 활용되지는 않았음을 유념해야 한다. 기껏해야 甲骨文字의 수준을 넘어서서, 象形文字나 形聲文字 형태로서 문자의 시원이 태동하였을 것이다.
또한 하도는 그림 단계이므로, 낙서의 문자 단계 이후에, 문자는 실제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홍범은 周나라 文王 이후에 비로소 현대에도 사용되는 문자로써 기록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철학체계도 더욱 심화되었을 것이다.
다만, 箕子 이전에 홍범에 대한 철학적 思惟體系 자체가 없었다는 것은 아니며, 현재 전해지는 홍범이 문왕 이후에 문자로 明文化되었을 것이라는 의미다. 또한 우왕이 홍범의 原作者라는 說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아주 먼 옛날의 일이므로, 그에 대한 검증이 결코 용이하지 않다.
그래서 書經集傳을 저술한 蔡? 역시, 고대의 文件을 대하는 어려움에 대하여 토로하고 있다. 書經에는 二帝三王의 大經大法이 모두 실려 있지만, 수천 년 후에 태어난 식견 얕은 자로서, 그것을 강론하여 밝힌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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