幽靈과 旅行者
幽靈이 떠돌고 있다.
온 세상에, 유령이 떠돌고 있다. 어느 理想主義者의 强辯처럼, 세상을 온통 집어삼키는 괴물로서, 너무도 거대한 유령이 떠돌고 있다.
그것은 마지막 유령이다.
하지만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미 너무도 많은 유령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一見, 온갖 유령의 갖은 떠돎이, 우리가 흔히 아는 인류의 역사다.
쉼 없이 얼음이 녹아 흐른다. 백파이프 소리가 아련히 들려온다. 마치 향피리 소리처럼, 끊어질 듯 이어진다.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는다.
實相, 유령은 고독한 피에로다. 아니 고독과 비탄으로 가득한, 피에로의 흔적이다.
대부분의 피에로에게, 슬픔 이외의 감정은 허락되지 않는다. 만약 슬퍼하지 않는 피에로가 실재한다면, 가장 먼저 그의 피에로로서의 자격은 剝奪될 것이다.
그래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피에로의 흔적은, 이미 유령을 닮는다.
그대. 여전히 고뇌하는 자여!
이제 그대는 피에로다.
그렇다. 흔적뿐인 피에로의 유령이다.
아는 얼굴 하나 없는 거대 도시.
지친 고래의 영혼은, 그 거리의 표면을 유령처럼 떠돈다. 어두워지면 알 만한 얼굴들마저도, 금세 어둠 속으로 숨어버린다.
수십 년 전부터 여행자는, 거대 도시에서 그런 유령들을 만났다.
최초의 낯섦이나 놀람과 달리, 수십 년 동안 지속되고 있는 유령과의 만남은, 이제 지극히 권태로운 일상이 되었다.
여행자는, 아주 흔해빠진 유령의 일원으로서, 숱한 유령들을 만난 것이다. 흔히 유령은, 거친 짐승처럼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상태의 사람을 닮았다.
다만, 그런 유령에게는 미래가 없다. 더구나 과거는 이미 그림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이제 남은 것은, 유령으로서의 狀態的 持續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늘 위의 God들은, 인간의 형상을 지닌 유령들의, 지독히도 어두운 코미디를 아주 재미나게 즐기고 있다.
만약 人間 幽靈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들은 천국에서의 무료한 일상을, 결코 견딜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지전능하다는 신들이 보기에, 인간 유령들의 삶은, 참으로 유치하고 천박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래서 아주 재미가 있다.
아득한 전설처럼, 인간 유령의 소문이 떠돈다.
결국은 떠돌아야만 하는 바람 같은 소문[風聞]처럼, 현실세계 여기저기에서 인간 유령이, 다시 떠돌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여행자는, 왜 자꾸 거대 도시를 찾아오는 것일까.
거대 도시에서 여행자는 철저히 고립된다. 저토록 무수한 얼굴 가운데서, 아는 얼굴이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극심한 고립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여행자는, 그야말로 철저한 유령이다. 더욱 치열하게 유령으로서 선다. 누구도 지각할 수 없는 흐릿함으로서, 세상에 선다.
과연 이 여행을 마칠 수 있을까.
여행자는 모든 상황이 막막하기만 하다. 곧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장마와 함께, 현재를 마무리할 준비도 서둘러야 한다. 대인기피증은 말할 것 없으며, 소음공포증 역시 악화되고만 있기 때문이다.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유령을 관념화시키는 것은, 아주 위험스런 일이다. 관념적 추상은, 곧잘 불가능을 넘어서버리기 때문이다.
물론, 불가능을 넘어서는 현상 자체는 바람직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넘어섬은, 지극히 형이상학적이라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근대 이후, 지속적으로 형이상학을 해체하려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지만 결국 여행자들의 여행은, 지극히 형이상학적이며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여행자들의 본성이며, 숙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렇게 뇌까렸던 것이다.
""인간이여, 피하라! 가혹한 검은 개가, 너의 곁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저 무지한 자들은, 여전히 온갖 욕망의 흔적만을 쫓고 있다.""
욕망의 흔적은 좇는 자들은 유령 자체이며, 그런 유령의 곁을 어슬렁거리는 검은 개는, 유령의 흔적이다. 사는 동안 니체는, 시나브로 그러한 실상을 보았던 것이다.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 아주 많은 것이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외려 지금 여기에서 요구되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행복은 좀 더 가까워진다.
그래서 지금 여기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렇게 작은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니.""
여행을 외면하는 많은 인간 유령은, 실로 불행한 존재다. 그런데 그 불행은, 그가 유령인 탓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외려 지금 그가 지나치게 행복하려고만 애쓰는 탓에, 불행해져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한 상황에 처하게 되면, 이미 심장이 늙어버린 청춘들은, 자기의 그림자에게 화풀이를 한다. 어쨌거나 그들의 심장은, 너무 일찍 취해버렸다.
어느 곳에서든, 유령은 다만 관찰한다. 굳이 참여하지 않는다. 그래서 유령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자기가 이미 유령이 되어버린 줄도 알지 못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유령은 또 다른 유령을 만나서, 새로운 유령을 생산하고서는 아주 기뻐한다. 이제 자기만큼 고통스러워할 새로운 대상적 존재가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령들은, 새로운 유령의 생성을 가장 위대한 작업으로 인식한다. 실상, 사는 동안 각 유령들의 유일한 단 한 번의 공동작업이, 섹스를 통한 새로운 유령의 생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유령이 탄생하는 순간, 유령들의 공동의 관계는 동시적으로 마감된다.
고통의 끈질긴 대물림.
이것이야말로 유령들의 삶을 규정하는, 가장 적절하며 가장 근접한 규정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유령으로서 살아내는 자여.
그리고 그대, 또 하나의 유령이여.
애써 누군가로부터 이해받고자 하지 말라. 그대가 누군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 역시 결코 그대를 이해할 수는 없다.
만약 누군가를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이거나 착각일 따름이다.
-하략-
본래 유령은, 어느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이해는, 신의 영역에서나 작동하는 심리적 기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령들은, 늘 신의 영역을 훔쳐보며 탐내지만, 결국 유령은 신의 영역에 들어설 수 없다. 신의 영역에 근접하려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흔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너는 무엇을 찾아 이곳에 왔느냐?""
하얀 노인의 물음에, 여행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그러한 물음에, 누군들 과연 어떤 대답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침묵으로 답할 밖에.
먹이를 찢어발기는 하이에나처럼, 어떠한 상황에서도 지겨운 족속들이 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그런 자들은 그들끼리 잘 어울리며, 도토리 키 재기하듯, 들쭉날쭉 잘도 살아간다.
그들에 대한 관심이 사라지고, 그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에서, 유령은 음울하지만 홀가분한 미소를 짓는다.
여행자는 도시에 있다. 아주 거대한 도시에 있다.
거대 도시에 있는 인간의 대부분은 청년이다. 그 까닭은, 청년이 가장 왕성한 노동력을 지닌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그 외에 별다른 이유는 없다.
거대한 도시에서, 노동은 곧 자본이다. 노동은, 시간을 내어줌으로써 돈을 얻게 되는 교환적 현상이다. 그리고 돈은, 이내 소모적 상품으로 교환된다.
그런 것이 바로, 유령들의 삶 자체다.
근대 이후, 실상 현실세계의 모든 것이 죄다 상품이다. 밥도 상품이고, 사람도 상품이다. 하물며 물도 상품이고, 공기도 상품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본과 상품의 욕망에 중독되지 않았다면, 결코 거대 도시의 청년일 수 없다. 아니 거대 도시의 청년이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욕망에의 중독은 청년의 특권이다. 청년의 중독은, 그야말로 욕망에의 몰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한 몰입은, 동시적으로 유령의 열정 또한 작동시킨다. 그러니 욕망의 상품으로부터 소외된다면, 그것은 곧 유령의 죽음일 따름이다.
그러다보니 거대 도시에서 청년의 죽음은, 시공간적으로 늘 현실세계로부터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어느 곳에서도, 노동할 수 없는 청년은 이미 유령이다. 청춘의 시절에 유령이 된다는 것은, 지극히 서글픈 노릇이다. 그런데 자꾸만 청년 유령이 많아지고 있다. 청년의 대부분이 유령이 되어 가고 있다.
유령에게는, 이제 청춘이 없다.
노동의 강도가 강해지고, 욕망에의 집착이 강해질수록, 청년은 유령으로서의 특성을, 보다 강렬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어린아이는 흘깃 유령을 본다. 두려움보다는 놀람이 앞선다. 어린아이는, 이렇게 생각한다.
왜 유령이 이런 곳에 있는 것일까?
유령은 어린아이의 생각을 읽었지만, 유령과 어린아이의 실제적인 만남은 재현되지 않는다.
어쩌면 어린아이가 이미 유령이고, 유령이 이미 어리아이인지 모른다. 다만, 하얀 노인만은 유령에게, 어쨌거나 이제라도 야생의 삶을 살아보라고 말했다.
여행자는, 항상 다시 시작해야 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의 목숨이 유한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인생은, 오직 단 한 번뿐이다.
그래서 인간존재들은, 영원한 삶을 상상해 냈을 것이다.
그러나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현실세계 어디에서도, 동일한 두 개의 시작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다시 시작한 것인 양, 잠시 착각할 따름이다.
여행자의 신경증이 다시 도지고 있다.
이미 유령은 자포자기 상태다. 이제 그들에게는 1년의 시간이 주어졌다. 딱 그만큼의 유예가 주어진 것이다.
여행자는, 항상 자신의 신경증을 인지한다. 자신의 신경증에 대한 연구를 하다 보니, 자연스레 주변인들의 신경증이나 정신질환 증세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파악이 시작되면서, 여행자에게는 말할 수 없는 공포가 찾아들었다. 자기 주변의 대부분의 인간들이, 죄다 심리적이거나 정신적인 질병을 지닌 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결코 환자가 아니라고 강변하는 자들일수록, 더욱 증세가 심각한 환자라는 사실은, 공포의 정도를 심화시켰다.
이 세상에는 정상인이 없는 걸까?
알고 보면, 정상인이라는 인간상은 가상이며 허구다. 그저 그림자권력이 바라는 인간존재의 모습을, 억지로 규정해 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비정상이라는 표현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현실세계의 대부분의 인간들이 비정상적인 존재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실은 결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사실이 진실일 수 없는 순간, 이미 진실은 조작되어 있다.
그렇다. 애당초 현실세계에, 진실이란 것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사실 자체가 있을 따름이다. 그렇게 애당초 존재할 수도 없는 진실을 추구하며, 한없이 자기 자신을 소모해버리는 대표적인 학문이 바로 철학이다.
참으로 오랜 시간 동안의 소모적 연구로써, 철학은 이제 진실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철학은, 차라리 스스로 진실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철학의 역사다.
진실을 만들어 내는 데, 좀 더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종교다. 그런데 종교는, 자기가 진실을 만들어 냈다는 사실마저도 쉬이 망각해버린다. 그리고서는 그 진실을 하나의 대상으로 변화시킨 후, 일부러라도 신앙해버린다.
실상, 진실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는 자들의 대부분은, 진실에 대한 강도 높은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그만큼 자기 스스로가 진실하지 못 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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