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帝國의 歷史, 大韓帝國
大韓帝國은 이미 잊혀진 帝國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제국을 일군 것은, 檀君과 高句麗 외에는 없는 듯하다. 비록 대한제국은 虛名에 불과하며, 당시의 상황을 어떻게든 견뎌보려는 苦肉之計였다. 그런 탓에 현대인들은 자의반타의반으로 그 역사를 忘却코자 한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짐짓 모르는 체 뭉개버린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다음은, 고종 34년 10월 13일(1897)의 기록이다.
""奉天承運皇帝는, 다음과 같이 詔令을 내린다.
짐은 생각건대, 檀君과 箕子 이후로 강토가 분리되어, 각각 한 지역을 차지하고는, 서로 패권을 다투어 오다가, 高麗 때에 이르러서, 馬韓, 辰韓, 弁韓을 통합하였으니, 이것이 三韓을 통합한 것이다.
우리 太祖가 왕위에 오른 초기에, 국토 밖으로 영토를 더욱 넓혀, 북쪽으로는 靺鞨의 지경까지 이르러, 상아, 가죽, 비단을 얻게 되었고, 남쪽으로는 耽羅國을 차지하여 귤, 유자, 해산물을 貢納으로 받게 되었다.
사천 리 강토에, 하나의 통일된 王業을 세웠으니, 禮樂과 법도는 唐堯와 虞舜을 이어받았고, 국토는 공고히 다져져, 우리 자손들에게 만대토록 길이 전할 반석같은 터전을 남겨 주었다.
짐이 덕이 없다 보니, 어려운 시기를 만났으나, 上帝가 돌봐주신 덕택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안정되었으며, 독립의 터전을 세우고, 자주의 권리를 행사하게 되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과 백성들, 군사들과 장사꾼들이 한목소리로 대궐에 호소하면서, 수십 차례나 상소를 올려, 반드시 황제의 칭호를 올리려고 하였는데, 짐이 누차 사양하다가, 끝내 사양할 수 없어서, 올해 9월 17일, 白嶽山의 남쪽에서, 天地에 告由祭를 지내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국호를 大韓으로 정하고, 이해를 光武 元年으로 삼으며, 宗廟와 社稷의 神位版을, 太社와 太稷으로 고쳐 썼다.
王后 閔氏를 皇后로 책봉하고, 王太子를 皇太子로 책봉하였다.""
이제 조선왕조는, 모름지기 대한제국이 되었다. 비록 대한제국이 되었을망정, 국가의 상황은 당최 겨를이 없었다. 더욱이 乙未事變(1895. 10. 8.)에 閔妃가 日本浪人 패거리에 의해 살해당한다. 민비의 행태나 조선왕조의 상황에 의한 결과이겠지만, 이는 실로 지울 수 없는 민족의 羞恥스런 汚辱이다.
현대에 이르러 민비를, 조선의 國母로서 더없이 德性있는 明成皇后로서 인식하려는 움직임이 강하다. 제 역사를 되도록 보기 좋도록 潤色하려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으나, 그 대상을 선택함에 있어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민비에 대해서는 여전히 各論이 紛紛하기 때문이다.
다음은 고종 34년 11월 22일의 기록이다.
""여러 신하들이 옛날 시호법을 상고하여, 온 나라에 빛이 미쳤다 해서, 明이라 하고, 예악이 밝게 갖추어졌다고 하여, 成이라고 하였다.
올리는 시호는 明成이라 하였고, 陵號는 洪陵이라고 하였으며, 殿號는 景孝라고 하였다.
...황후는 여러 차례 책봉하는 글을 받았다. 계유년에는 朝臣들이 尊號를 올려 孝慈라고 하였고, 무자(1888), 경인(1890), 임진년(1892)에는 황태자가 尊號를 더 올려, 元聖正化合天이라고 하였다.
정유년에는 대소 신하와 백성들이, 나라가 독립의 기초를 세우고, 자주권을 행사한 것 때문에, 明나라 이후에 천하의 禮樂이, 다 우리나라에 있으니, 마땅히 황제의 계통을 계승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민비가 살해당한 후,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이 되면서, 민비 또한 명성황후로 추존한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표면적으로 明成이라는 諡號의 의미는, 실상 그 기사의 전체를 감안한다면, 과거 明나라에 대한 事大主義가 완성되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애당초 제국으로서, 황제의 국가라는 의지는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현대의 대한민국 역시 그러하다. 남북통일로써 만주라는 故土를 收復하여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패권국으로서 浮上코자 한다면, 그저 자기편의 政權을 유지하거나, 새로운 執權을 위하여, 附和雷同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의 고종실록을 살피면, 무능하고 파렴치할수록 아주 그럴듯한 美辭麗句로써 온갖 논리를 늘어놓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행위로써는, 결코 국가공동체를 살려낼 수 없음을, 우리는 역사로써 검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그러한 역사는 되풀이되는 듯하다. 그러니 비록 별다른 권력을 지니지 못했을망정, 이 시대를 살아내고 있는 각 個人이 명료히 깨어서, 민족과 국가의 미래를 위해 참으로 부단한 苦惱를 마다하지 않아야 것이다. 세상 어디에도 공짜는 결코 없는 법이니까.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大韓帝國은 가장 비극적인 국가공동체 중 하나였던 탓에, 텅 빈 허공에 대한제국의 성립을 외침은, 한갓 喜劇的 퍼포먼스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역사에서는, 그러한 비극이야말로 진실을 드러냄을 留念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오히려 수치스럽고 고통스런 역사일수록, 微視史의 관점으로써 더욱 세밀히 살펴야 하는 까닭이다.
누구라도 자랑스레 떠들어댈 만한 역사라면, 굳이 어느 누가 針小棒大할 이유가 없다. 그러니 역사적 歪曲의 가능성은 별로 없다. 물론 상대편의 입장은, 예컨대 일본이나 중국의 역사 왜곡처럼, 그 반대일 것이다. 그러나 어쩐지 남사스런 역사라면, 어떻게든 없는 양 하는 것이 人之常情이다. 대한제국의 역사가 실로 그러하다.
기묘한 노릇이지만, 필자 개인의 삶을 회고할 때도 그러하다. 필자도 적잖은 세월을 사는 동안, 이런저런 체험 속에서 삶의 여정을 지속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삶이란 것이 마냥 좋고 행복한 일만 지속될 리 만무하다. 그러다보니 차라리 자살해버리는 게 나을 것이라고 생각할만큼, 치욕스럽고 고통스런 체험도 하게 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런 일마저도 당최 목숨을 스스로 끊을만한 일은 아님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 아픈 체험의 기억이 망각될 리 없다. 그래서 필자의 마음은, 저절로 자기합리화로써 생존에 유익한 기억만을 보다 부각시키며, 害가 되는 기억은 저절로/스스로 무의식 저편으로 潛在시킨다. 이는 참으로 自然스런 현상이다.
예컨대 필자로서는, 지난날 철학과 대학원에서 집단에 밀려 겪었던 일들이나, 이후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온갖 갑질을 당해야만 하던 일들이 想起되면, 지금 이 순간에도 몸서리를 칠만큼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러한 侮辱 또한 필자의 삶의 한 부분일 따름이다. 그러한 체험을 부정할 수도 없고, 그러할 까닭도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체험 속의 人間群像들과 再會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다만, 필자가 지속적으로 출판을 하는 탓에, 그에 대해 인터넷 따위를 통해, 지극히 천박한 대응을 해오는 짓거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감내해야만 한다. 여하튼, 여전히 필자는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그러니 그런 일들에 대해 참으로 잘 제어하여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선지 대한제국의 역사를 살피며, 무슨 까닭인지 자꾸만 필자의 삶이 오버랩된다. 대한제국의 시절을 극복하고서, 이제 대한민국은 세계 속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이르러, 세계 패권국의 무역전쟁과 북한 문제 등으로 인해, 금세 역사의 나락으로 떨어질는지 모른다. 필자의 삶 역시, 그런 치욕스런 체험 이후에도, 여전히 생존을 위해, 이런저런 직업군을 전전하며, 최하층의 삶이나마 감내해야만 한다.
하지만 대한제국의 역사처럼, 어떤 사실 자체를 공부하여 그 진실을 알게 될 때, 다소나마 삶의 의미를 찾는다. 가뜩이나 빈곤한 삶인데, 의식마저 비루하다면, 그 삶은 참으로 비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원하는 만큼의 삶을 일구지는 못했지만, 이만큼이라도 공부하며 살아낼 수 있음은, 天地, 父母, 同胞, 法律 등 四恩의 은혜임이 자명하다.
특히 하늘땅과 부모의 은혜는, 더 이상 말할 나위 없다. 그러한 은혜가 없었다면, 어떻게 지금 필자가 지금껏 생존했으며, 이 글들을 지어낼 수 있었겠는가. 우리 민족에게 아픈 역사야말로, 우리 민족에게 그러한 의미를 갖는다. 온갖 표면의 화려함이 나를 살게 하는 양 착각하지만, 정작 내면의 소박함이 나를 살게 하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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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조선왕조의 정치적 지향은 洪範九疇의 실현이었다. 그러한 洪範의 정치철학적인 구체적 지향은 天命의 실현이다. 천명은 백성의 마음[民心]이 반영된 하늘의 명령이다. 그러한 천명을 현실세계에서 실현하기 위해서는, 五行의 원리를 체득하여 五事로써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 오행을 체득하기 위해서는, 五紀를 파악하고 庶徵을 분석할 수 있어야 하며, 稽疑를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할 때 천지자연의 오행이, 인간존재에게서 오사로써 실천될 수 있다. 오사를 실천하는 인간존재 중에서, 천명을 부여받은 자는 皇極으로서 군주가 된다. 황극으로서 군주는 三德을 실행하고 八政을 펼쳐서, 백성들에게 五福을 베풀어 주고 백성들의 六極을 보살펴 주어야 한다. 그것이 홍범이 지향하는 善政의 상태다.
조선왕조의 정치철학은 洪範을 國是로 삼고서 性理學的 道德政治의 실현을 목적한다. 홍범의 정치철학이 지향하는 사회는, 후대에 공자가 논변하는 大同과 小康으로서 표현될 수 있다. 大同 개념은 홍범에서 최초로 등장하고, 小康 개념은 詩經에서 최초로 등장한다. 이후 공자가 처음으로 대동과 소강에 대해 정치철학적 논변을 한다.
대동은 말할 나위 없이 정치적으로 완성된 상태로서, 이데아가 실현된 現場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런 탓에, 홍범의 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도록 실현되지 못 한 理想鄕이다. 그리고 天命에 의한 天罰로써 응징되어야 할 상태로부터 조금 나아진 상태가 小康이다. 그러므로 소강에서 停滯되어서는 안 된다. 그야말로 조금 편안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대동의 상태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孔子 이후 대동과 소강은 정치철학적인 개념으로서 정립된다. 이후 儒家에서는 흔히 儒學의 정치철학이 지향하는 政治狀態가 대동인 것으로 규정한다. 그런데 실제로 대동을 지향한 상황은 역사에 등장하지 않으며, 대부분 소강의 상태를 지향했을 따름이다. 조선왕조 역시 그러하다.
공자가 정립한 小康의 理論은 그것을 실제로 실현하는 일이 결코 용이하지 않은, 고도의 善政이 이루어지는 상태다. 그런 탓에, 조선왕조에서 논의되는 선정은 대체로 소강의 상태를 지칭한다. 다만, 공자는 小康의 家天下에 만족하지 않고, 大同의 公天下을 꿈꾸었다. 이는 공자의 정치철학이 현대에 이르러서도 의미와 가치를 갖는 충분한 까닭이다.
정치철학적 관점에서, 조선왕조 후기로부터 말기에 이르는 정치적 상황에 대한 평가는 가혹하기 십상이다. 여느 왕조들처럼 국가공동체가 멸망에 이르는 末期的 상황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흔히 商나라의 말기적 상황이 죄다 주왕의 失政 때문인 것으로 인식하지만, 한 王朝나 國家가 멸망할 때에는 최후의 最高權力者 혼자만의 과실에 의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대목은 마치 고려왕조 말기에 토지제도가 문란해져서 富益富貧益貧이 극심해지고, 외적의 침입이 빈번해지는 말기적 상황과 별다르지 않다. 역사 안에서, 대부분의 왕조 말기에는 內患이든 外患이든 말기적 상황이 연출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왕조가 멸망할 까닭은 없을 것이다.
그러한 말기적 상황에서 이루어진 상나라 주왕과 주나라 무왕의 왕조 교체는,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왕조 교체의 모델로서 지속적으로 膾炙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연출되는 정치는 참으로 볼품없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적 상황이 그러하다는 것이며, 현실정치 이외의 모든 측면을 부정하거나 거부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문화나 예술 등은 자랑스럽게 내세울 것이 많다. 도덕이나 법률의 측면에서도 본받을 것은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결국 그러한 부문은 단편적일뿐, 조선왕조 자체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정치라는 것은 조선왕조 자체를 의미한다. 그런 탓에, 부득이하게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엄밀한 비판이 요구되는 것이다.
洪範의 정치철학이 지향하는 바는 天命의 실현이다. 그런데 홍범의 시대로부터, 천명이 하늘[天]로부터 離隔되는 순간 천명은 변질되기 시작한다. 현실세계의 어디에도 절대 순수의 이데아는 실재하지 않음과 같다. 천명은 천지자연 자체에 본디 상태로 존재할 때만 천명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의 천명은 인간존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래서 천명은 인간존재에게 인식되어야만 하는데, 인간존재가 천명 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애당초 천명은 본디 상태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현실세계에 드러나는 어떠한 천명일지라도, 그것은 인간존재의 이해와 해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천명에 내재된 不得已다.
서경 홍범에는 大同 개념이 최초로 등장한다. 洪範九疇의 農用八政 중 일곱 번째 조목 稽疑에 기술되어 있다. 이는, 대동 개념이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明文化된 최초의 사례다. 임금이 따르고, 거북점이 따르고, 시초점이 따르고, 높은 벼슬아치가 따르고, 서민이 따르면, 이것을 대동이라고 하니, 몸이 평안하고 굳세며, 자손을 두면, 길할 것이다.
이러한 대동은 말 그대로 위대한 同一性을 의미한다. 君主, 占卜, 臣下, 庶民 등이 모두 따르는[從] 상태, 그것이 곧 대동이다. 그렇게 세상의 온 존재가 실제적인 滿場一致로써 합의될 수 있는 상태는, 천명을 좇아 천명을 실현하는 경우 이외에는 없다. 홍범에서는 이렇게 만장일치를 이루는 상태에 대한 묘사 이외에는 대동 개념이 등장하지 않는다.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홍범의 대동 개념이 등장한 이후, 천명이 실현되는 대동의 상태에 대하여 최초로 학술적 論辯을 시도한 것이 공자다. 대동과 소강에 대한 아주 잘 알려진 談論이 있다. 禮記 禮運에서는, 孔子와 그의 제자 言偃(子游)이 대동과 소강에 대해 問答한다. 공자가 이르기를, 大道가 실행될 때와 夏商周 3대의 賢人들이 정치를 했을 때에 대해, 내가 그 시절의 수준에 미칠 수는 없지만 기록을 통해 그 정신은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공자가 알 수 있다고 말하는 대도는 곧 천명이다. 따라서 하상주 3대의 현인들이 대도를 실행했다는 것은 곧 천명을 실행했다는 의미다.
대도가 실행되던 때는, 세상이 公天下였다고 比定될 수 있다. 공천하에서는, 어질고 재능 있는 이들을 선발하고, 신용을 중시하며 화목함을 닦고, 사람마다 자기 어버이만이 어버이가 아니고, 자기 자식만 자식이 아니다. 노인들로 하여금 여생을 완성하게 하고, 장년은 쓰임이 있고, 어린이들은 교육을 받는다. 늙어 부인이 없거나, 늙어 남편이 없는 아낙, 부모 없는 아이, 자식이 없는 노인, 장애인들이 모두 부양받는다.
사내에게는 그에 적합한 직분이 있고, 아낙은 의지할 곳이 있다. 재물이 폐기되는 것을 싫어하여, 결코 과분하게 소유하지 않는다. 힘은 자기 몸에서 나오지 않음을 꺼려 직접 쓰지만, 자신을 위해서만 쓰지는 않는다. 그러한 정서 때문에, 권모술수가 막혀 흥기하지 못 하고, 도적이나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하므로 바깥문도 잠그지 않는다. 공자는 이러한 이상적인 사회를 대동이라고 규정한다.
공자(기원전551~기원전479)보다 50여 년 후에 태어난 플라톤(기원전427년~기원전347) 역시 理想國家를 제시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가 요구되는 까닭은, 현실의 국가가 말기적 상황에 이르러서, 必要不可缺한 것들 이상의 것들을 갖추고서 사치스런 생활을 하는, 부풀어 오른 염증 상태의 나라(plegmainousa polis) 혹은 돼지들의 나라(hy?n polis)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염증으로 부풀어 오른 돼지들의 나라를 법률과 제도로써 정화한 최선의 국가가 완벽하게 좋은 이상국가다.
이상국가는 1人 1業의 원리에 충실하고, 그래서 성향에 따라 수립된 나라(kataphysin oikistheisa)이다. 그렇기 때문에, 支配 계층과 被支配 계층과 守護 계층이 각기 조화를 이루어 하나가 되는 국가다. 이상국가는 무엇보다도 正義를 최대한 실현하는 나라이며, 그렇기 때문에 소수의 사람들이나 어느 한 집단이 특별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시민 전체가 최대한 행복을 누리는 국가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도 공자의 공천하와 유사하게, 재산의 공동소유, 사유재산 금지, 각 구성원의 공동생활 및 공동참여 등을 예시하고 있다. 플라톤은 실제적으로 이상국가를 실현하기 위해, 철학자들이 왕이 되거나, 아니면 현재의 君王 내지 最高權力者로 불리는 자들이 철학자로 되는 것을 주장한다. 즉, 정치권력(dynamis politik?)과 철학이 하나로 결합되는 것이다.
홍범의 정치철학이 조선왕조에 이르도록 이상사회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 활용되었듯이, 플라톤 역시 정치와 철학이 결합된 정치철학으로써 이상국가를 실현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일종의 플라톤 식 大同이라고 할 것이다. 동양문명에서는 공자 이후 다양한 이상사회가 제시되었고, 서양문명에서는 플라톤 이후 다양한 이상국가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도록 역사 안에서 그런 이상사회나 이상국가가 실제적으로 실현된 例는 없다. 실현되지 않으므로 理想的일 수밖에 없다는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최상의 정치가 실현되는 것으로 인식되는 대동과 아울러 논의되는 정치의 수준을 小康이라고 한다. 書經 洪範에 등장하는 대동 개념과 마찬가지로, 詩經 大雅에 등장하는 소강 개념 역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최초로 명문화된 사례다. 시경에서 이르는 소강은, 백성들이 여전히 수고롭다가 겨우 조금 편안해진 상태다.
겨우 조금 나아진 상태이므로, 나라의 중앙에서부터 더욱 은혜를 베풀어서, 온 나라가 평안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상태다. 대동의 상태는 아니지만, 그나마 백성의 삶[民生]을 유지하며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수준의 정치적 상태가 小康이다. 최악의 상태에서 조금 나아진 상태인 것이다. 大同이라는 것은, 孔子 이후 儒學에서 지향하는 일종의 정치적 理想鄕이다. 이상향이기 때문인지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대동의 상태가 실제로 실현된 例는 없다.
그런데 그 실제적인 이유는, 禮記 禮運에 기술된 공자의 분석처럼, 현실세계 대부분의 국가공동체는 대동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소강의 상태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공자는 예기 예운에서, 소강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발언한다. 오늘날은 公天下의 大道가 사라져서, 세상이 家天下가 되어버렸다.
사람마다 자기 어버이만을 어버이라 여기고, 자기 자녀만을 자녀로서 챙긴다. 재물과 권력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쓴다. 천자와 제후들은 禪讓 대신 世襲을 예의로 여긴다. 성곽을 쌓고 垓字를 파서 자기방어만을 공고히 한다. 공자는 이러한 상태가 家天下의 小康이라면서 비판한다. 그런데 소강은 결코 쉬이 이룰 수 있는 정치적 상태는 아니다.
소강을 실현하려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상태가 실행되어야 한다. 五倫으로 기강을 삼음으로써 군신관계를 정립하고, 부자관계를 돈독히 하며, 형제간에 화목하고, 부부 사이는 조화로워야 한다. 정치제도를 정립하고, 밭의 경계를 정해야 한다. 현명하고 용맹한 자를 우대하고, 功績을 자기 것으로 여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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