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1786~1856)는, 18세기 말에 태어나서, 19세기 外戚勢道 政治期에 활동한, 모름지기 朝鮮王朝 최고의 書藝家로서 藝術家이다. 다음은 추사 김정희의 예술세계에 관하여, 김영한, 정인보, 신석희, 남병길, 민규호, 민노행 등이 기술한 몇 편의 기록이다.
아래의 기록 중에도 기술되었지만, 김정희가 流配의 삶을 살게 되는 情況을 살피면, 조선왕조의 政權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强固한 것인지를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추사는 기존의 性理學的 지배 이데올로기에 비판적이었다. 性理學이란 기본적으로 명나라의 통치 이데올로기다. 반면에 추사는, 北學派 朴齊家에게서 학문을 전수받음으로 인해, 중원벌판에서 새로운 覇權으로 자리매김한 청나라의 고증학적 이념체계를 모색하였다. 그런데 설령 그렇다고 해도, 추사 역시 중국에 대한 事大主義를 기반으로 하므로, 철저히 중국의 것을 苦心할 따름이다.
여하튼 이러한 流配的 체험이 추사의 예술세계를 더욱 심오하게 完熟시켰을 것임은 두말 할 나위 없다. 예컨대, 제주도 유배로써 秋史體가 완성되었음이 바로 그러하다. 이에 추사체는 추사 김정희의 삶 자체의 예술적 品格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顯現되었다고 할 것이다. 그러니 비단 추사체에 의해 제작된 예술작품만이 아니라, 추사체 그 자체가 곧 예술작품이라고 해야 한다.
추사는 學術辨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학술이 天下에 있어, 수백 년을 지나면 반드시 변하게 되는데, 그것이 장차 변하려 할 적에는, 반드시 한두 사람이 그 단서를 엶에 따라, 천백 사람이 시끄럽게 그것을 공격하게 되고, 그것이 이미 변한 뒤에는, 또 한두 사람이 그 이룬 것을 한데 모음으로써, 천백 사람이 모두 그것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시끄럽게 그것을 공격할 적에는, 온 천하 사람이 학술의 서로 다른 것을 보게 되므로, 그 폐단이 드러나지 않지만, 모두가 그것을 따를 적에는, 천하 사람이 학술의 서로 다른 것을 보지 못하므로, 그 폐단이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를 당해서는, 반드시 한두 사람이 그 폐단을 바로잡아, 의연히 이를 견지하게 되고, 그 변한 것이 이미 오래됨에 미쳐서는, 국가를 소유한 자가 法制로 얽어매고, 利祿으로 유인하여, 아이들은 그 학설을 익히고, 늙은이들은 그것이 그른 줄을 모름으로써, 천하 사람이 서로 그것을 편히 여기게 된다.
그러다가 천하 사람이 그것을 편히 여긴 지 이미 오래되면, 또 어떤 사람이 일어나서, 그것을 변개시킬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천고 이래 학술 변천의 대략이다.
...아, 학술이 변할 때에 당해서는, 천백 사람이 시끄럽게 공격하는데, 그들은 모두 용렬한 위인들이고, 학술이 이미 변한 뒤에는, 또 천백 사람이 모두 그것을 따르는데, 그들 또한 용렬한 위인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폐단을 바로잡아 꿋꿋하게 견지할 자가, 그 누구란 말인가.""
여기서 학술이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이데올로기다. 조선왕조야말로 학술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삼은 대표적인 政體이다. 그런 학술 자체가 그릇될 것은 없지만, 그것이 어떤 權力體로서 작동하게 될 때, 부득이하게 이데올로기적 폐해가 발생케 됨을, 추사는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폐단이 될만큼 권력적이지 못하다면, 애당초 그 학술은 정립될 수 없다. 이야말로 不得已다.
추사는, 그런 학술의 기묘한 이데올로기적 權力機制를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21세기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예컨대, 현대의 대한민국의 경우, 자유민주주의를 多數決의 集團쯤으로 誤解하는 事態가 그러하다. 輿論이란 것은 실상, 추사의 분석처럼, 자기의 이득을 좇아 용렬하게 작동하는 기괴한 集團的 時流일 따름이다.
變化와 衝突의 시대라면, 응당 그러한 弊端이 확연히 드러나기 마련이다. 그런데 흔히 集團의 決定이란 것은, 이데올로기적이기 십상이다. 그런 탓에, 추사 역시 유배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추사는 결국 자기의 길을 간다. 실상 권력으로부터 流離되어버린 상태에서, 추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것뿐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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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는, 조선왕조 勳戚家門의 하나인 慶州金門에서, 병조판서 金魯敬과 杞溪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큰아버지 金魯永 앞으로 出系하였다. 그의 가문은 안팎이 宗戚으로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다. 그야말로 당대의 엘리트 금수저라고 할 것이다.
1819년(순조 19) 문과에 급제하여, 암행어사, 예조참의, 설서, 검교, 대교, 시강원 보덕 등을 지냈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尹商度의 옥사에 배후 조종 혐의로, 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순조의 특별 배려로, 귀양에서 풀려나 判義禁府事로 복직되고, 그도 1836년에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 그는 다시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부터 1848년까지, 9년간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헌종 말년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그러나 1851년, 친구인 영의정 權敦仁의 일에 연루되어, 또다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 돌아왔다. 이 시기는 안동 김씨가 득세하던 때라서, 정계에는 복귀하지 못하였다. 이에,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學藝와 禪理에 몰두하다가 생을 마쳤다.
김정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백이 뛰어나서, 일찍이 北學派 朴齊家의 눈에 띄어, 어린 나이에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그의 학문 방향은, 청나라의 考證學 쪽으로 기울어졌다. 24세 때 아버지가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갈 때, 수행하여 연경에 체류하면서, 翁方綱, 阮元 같은 이름난 유학자와 접할 수가 있었다. 이 시기 燕京學界는 고증학의 수준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종래 經學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金石學, 史學, 文字學, 音韻學, 天算學, 地理學 등의 학문이, 모두 독립적인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금석학은, 문자학과 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귀국 후에는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금석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北漢山巡狩碑를 발견하고, 禮堂金石過眼錄, 眞興二碑攷와 같은 역사적인 저술을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 대표적인 학자들로서는, 申緯, 趙寅永, 權敦仁, 申觀浩, 趙冕鎬 등을 들 수 있다.
그의 경학은 옹방강의 漢宋不分論을 근본적으로 따르고 있었다. 그의 경학관을 요약하여 천명하였다고 할 수 있는 實事求是說은, 經世致用을 주장한 완원의 학설과 방법론에서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밖에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청대 학자들의 학설을 박람하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을 소화하였다. 음운학, 천산학, 지리학 등에도 상당한 식견을 가지고 있음이, 그의 문집에 수록된 왕복 서신과 논설에서 나타난다.
다음으로 그의 학문에서 크게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佛敎學이다. 용산의 저택 경내에 華嚴寺라는 가족의 願刹을 두고, 어려서부터 승려들과 교유하면서 佛典을 섭렵하였다. 그는 당대의 고승들과도 친교를 맺고 있었다. 특히 白坡와 草衣, 두 대사와의 친분이 깊었다. 그리고 많은 불경을 섭렵하여, 고증학적인 안목으로 날카로운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당시 승려들과의 왕복 서간 및 影幀의 題辭와 跋文 등이, 그의 문집에 실려 있다. 말년에 수년간은 과천 奉恩寺에 기거하면서, 善知識의 대접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의 학문은 여러 방면에 걸쳐서 두루 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청나라의 이름난 유학자들이, 그를 가리켜 海東第一通儒라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그 자신도 이 美稱을 사양하지 않을 만큼 자부심을 가졌던 민족문화의 거성적 존재였다.
김정희는 예술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그의 예술은 詩書畵 一致 사상에 입각한, 高踏的인 理念美의 구현으로, 고도의 발전을 보인 청나라 고증학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그래서 종래 성리학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발전을 보여 온, 조선 고유의 國書와 國畵風에 대하여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는 바로 전통적인 조선 성리학에 대한, 그의 학문적인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을 인정받아, 20세 전후에 이미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예술이 본 궤도에 오른 것은 역시 燕京에 가서 명유들과 교유하여, 배우고 많은 眞蹟을 감상함으로써 안목을 일신한 다음부터였다. 옹방강과 완원으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도사 및 서법에 대한 전반적인 가르침을 받고서, 書道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달리했다.
옹방강의 서체를 따라 배우면서,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 趙孟?, 蘇東坡, 顔眞卿 등의 여러 서체를 익혔다. 다시 더 소급하여 漢 · 魏시대의 여러 隷書體에 書法의 근본이 있음을 간파하고, 본받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들 모든 서체의 장점을 밑바탕으로 해서, 보다 나은 독창적인 길을 創出한 것이 바로 拙樸淸高한 秋史體이다.
추사체는 말년에 그가 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완성되었다. 타고난 天稟에다가 무한한 단련을 거쳐, 이룩한 고도의 이념미의 표출로서, 거기에는 일정한 법식에 구애되지 않는 법식이 있다. 그는 詩道에 대해서도, 당시의 고증학에서 그러했듯이, 철저한 正道의 수련을 강조했다. 스승인 옹방강으로부터 蘇軾, 杜甫에까지 도달하는 것을, 詩道의 정통과 이상으로 삼았다. 그의 시상이 다분히 實事求是에 입각한 것은 당연한 일로서, 그의 저술인 詩選諸家總論에서 詩論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畵風은 대체로 蘇軾으로부터 이어지는 철저한 詩書畵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는 것이었다. 그림에서도 書卷氣와 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心意를 중시하는 文人?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마치 隷書를 쓰듯이,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枯淡하고 간결한 筆線으로 心意를 노출하는 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특히 그는 蘭을 잘 쳤다. 그래서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겨서 말하였다.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의 서화관은 가슴 속에 淸高古雅한 뜻이 있어야 하며, 그것이 문자향과 서권기에 무르녹아 손끝에 피어나야 한다는, 지고한 이념미의 구현에 근본을 두고 있다.
이러한 그의 예술은 趙熙龍, 許維, 李昰應, 田琦, 權敦仁 등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서화가로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선 후기 藝苑을 풍미하였다. 현전하고 있는 그의 작품 중 국보 제180호인 歲寒圖와 ??圖, 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詩書畵 이외에, 그의 예술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篆刻이다. 전각이 단순한 印信의 의미를 넘어서, 예술의 한 분야로 등장한 것은, 명나라 중기였다. 청나라의 碑派書道가 낳은 鄧石如에 이르러서, 크게 면목을 새롭게 하였다. 김정희는 등석여의 전각에 친밀히 접할 수가 있었고, 그밖에 여러 학자들로부터 자신의 印刻을 새겨 받음으로써, 청나라의 전각풍에 두루 통달하였다.
古印의 印譜를 얻어서 직접 秦漢의 것까지 본받았다. 그의 전각 수준은 청나라와 어깨를 겨누었다. 그의 별호가 많은 만큼이나 전각을 많이 하여서 서화의 落款에 쓰고 있었다. 추사체가 확립되어 감에 따라 독특한 自刻風인 秋史刻風을 이룩하여, 拙樸淸瘦한 특징을 드러내었다.
김정희의 문학에서, 시 아닌 산문으로서 翰墨을 무시할 수 없다. 단순한 편지가 아니라, 편지 형식을 빌린 문학으로서, 수필과 평론의 기능을 가지는 것이다. 그의 문집은 대부분이 이와 같은 편지 글이라고 할 만큼, 평생 동안 편지를 많이 썼다. 그리고 편지를 통해서, 내면 생활을 묘사하였던 것이다.
그중에도 한글 편지까지도 많이 썼다는 것은, 실학적인 語文意識의 면에서 높이 평가할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그의 친필 諺簡이 40여 통에 이르는데, 제주도 귀양살이 중에 부인과 며느리에게 쓴 것이다. 국문학적 가치로 볼 때, 한문 서간보다 월등한 것이다. 또 한글 서예 면에서 민족 예술의 뿌리가 되는 고무적인 자료이다. 한문과 국문을 막론하고, 그의 서간은 한묵적 가치 면에서 새로운 주목을 받고 있다.
그의 문집은 네 차례에 걸쳐 출판되었다. 阮堂尺牘(2권 2책, 1867), 覃?齋詩藁(7권 2책, 1867), 阮堂集(5권 5책, 1868)이 있다. 그리고 완당선생전집(10권 5책, 1934)은 종현손 金翊煥이 최종적으로 보충, 간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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