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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선비 매천 황현의 죽음의 미학, 매천집

황현 지음(탁양현 엮음) | e퍼플
  • 등록일2018-12-17
  • 파일포맷epu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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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自殺의 悲劇 죽음의 美學 그리고 梅泉 黃玹
매천 황현의 죽음은, 지극히 美學的이며 藝術的인 사건이다. 自殺이라는 죽음의 形式으로써, 자기의 삶 자체를 하나의 藝術作品으로서 완성시켰기 때문이다. 그러한 藝術作品性은 그의 絶命詩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다음은 매천 황현의 절명시 4편이다.
난리 속에서 어느덧 백발의 나이가 되어버렸네
亂離滾到白頭年
몇 번이고 죽어야 했는데 차마 그러지 못했네
幾合捐生却未然
오늘 참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今日眞成無可奈
바람 앞의 촛불만 밝게 하늘을 비추네
輝輝風燭照蒼天
요사스런 기운이 자욱해 황제의 별이 옮겨 가니
妖???帝星移
침침한 궁궐에선 시간마저도 더디 흐르네
九闕??晝漏遲
임금의 명령일랑은 이제 더 이상 없을 테니
詔勅從今無復有
종이 한 장 채우는 데도 천 줄기 눈물뿐이네
琳琅一紙淚千絲
금수도 슬피 울고 산하도 찡그리더니
鳥獸哀鳴海岳嚬
무궁화 세상은 이미 물속에 잠겨버렸네
槿花世界已?淪
가을날 등불 아래서 책을 덮고 먼 옛날 회고하니
秋燈掩卷懷千古
인간 세상 지식인 노릇 참으로 어렵기만 하네
難作人間識字人
짧은 서까래만큼도 지탱한 공 없었으니
曾無支厦半椽功
단지 살신성인일 뿐 충성은 아니라네
只是成仁不是忠
결국 송나라 윤곡의 자살을 흉내 내고 있으니
止竟僅能追尹穀
그때 진동처럼 저항치 못한 것이 부끄러울 따름이네
當時愧不?陳東
고독한 자살 여행자 매천 황현의 죽음을, 대체로 殉國, 絶命, 自決로써 표현한다. 어쩐지 自殺이라는 표현은, 不敬한 것으로 인식하는 듯하다. 그런데 그는 분명 飮毒自殺했다. 절명시에서 드러나듯, 황현 자신도, 보다 적극적인 獨立運動이나 義兵抗爭을 하지 못하고서, 그저 자살의 형식을 취하는 無力함을 한탄한다.
乙巳條約을 乙巳勒約으로, 韓日合邦을 庚戌國恥로, 閔妃를 明成皇后로 표현한다고 해서, 지난 歷史의 汚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歷史的 解釋은 달라지게 된다. 植民史觀을 지녔는가, 民族史觀을 지녔는가에 따라, 事大主義史觀을 지녔는가 등에 따라, 사용되는 표현은 응당 다를 것이다.
그러나 설령 歪曲되어버린 역사일지라도, 기존의 역사 자체를 消失시켜서는 안 된다. 왜곡된 역사 역시 망각되어서는 안 될 역사다. 다만 역사적 해석의 측면에 있어, 명료히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황현의 죽음을 순국이라 하든, 절명이라 하든, 자결이라 하든, 자살이라 하든, 다만 적어도 그 죽음 자체의 實在를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近來에도 어느 대통령의 죽음에 대하여, 逝去와 自殺이라는 표현으로써 論難이 紛紛했다. 어느 國會議員의 죽음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그런데 실상 둘 다 그릇된 표현이 아니다. 그들의 죽음이 지닌 現象的 事實 자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단지 그 죽음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다를 따름이다. 그러니 서거라고 주장하는 측과 자살이라고 주장하는 측의 역사는, 모두 그 자체로서 保傳되어야 한다.
다음은 매천집 중에서, 졸고를 초록한 책 뒤에 써서 중삼에게 주다라는 글이다.
나는 어린 시절 더러 총명하다는 추임을 받아, 일찍부터 쓸데없는 과거 공부에 매달렸다가, 스물에야 비로소 近體詩를 익혔고, 서른에 비로소 散文을 배웠다.
선배나 長老 가운데, 大家로 칭하는 분들을 볼 때마다, 손을 꼽아 그 나이를 따져 보고는, 나도 저 나이가 되면 저렇게 되겠지. 하고 외람되이 생각하곤 하였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마흔이 되어, 이렇게 빈손이 된 뒤에야, 문장은 정해진 운명이 있으며, 나이로 논할 수 있는 게 아님을 알았다.
중삼을 보면, 번번이 내 어린 시절의 일이나, 당대 대가들의 나이가 얼마인지 묻곤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의 생각이 내 지난날과 같은 점이 있다고 느꼈다.
매천은 당대의 秀才였다. 조선왕조에서 매천 황현과 같은 재능을 지녔다면, 응당 立身揚名을 도모키 마련이다. 그런데 生來的으로 시대와 不和했던 매천은, 철저히 世間을 외면하고 은둔하며, 빈곤 속에서 자기의 학문을 지속해 간다. 그러면서 자기의 학문이 完成으로 나아가지 못함을 悔恨한다. 이러한 태도는, 조선왕조의 사대부에게서 쉬이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필자로서는, 자꾸만 황현의 삶의 旅程에 필자의 형편이 오버랩된다. 다만 필자는 황현 같은 수재가 아니며, 어린 시절부터 실로 鈍才이다. 그저 황현처럼 학문을 좋아할 따름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것에 매이지 않으며, 필자 나름의 學問旅程을 걷다 보면, 차츰 나아져서 일정한 수준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했었다. 그러나 어느새 황현의 회한에 공감하는 나이가 되고보니, 왜 황현이 위와 같이 吐露했는지 알 듯하다.
인간은,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크게 나아지는 존재는 아니다. 애당초 나아질 만한 人材라면, 이미 어릴 적부터 그 幾微를 드러내는 법이다. 그러니 자기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당최 이룰 수도 없는 허망한 일에, 온통 인생을 저당잡혀 虛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나이 들어서 후회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라 할 것이다.
朝鮮王朝로부터의 弊害的 慣性을 논할 때, 兩班에 대해 곧잘 거론한다. 어느 시대든, 그 시대의 잘못에 대한 책임은, 旣得權을 지닌 지배세력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조선왕조를 비판할 때는, 不得已 王室이나 兩班士大夫가 그 주된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러할 때에는 양반을 욕하면서도, 정작 자기 家門을 소개할 때는, 어떻게든 由緖 깊은 兩班家이고자 한다. 하지만 조선왕조 인구의 40% 가까이는 奴婢였고, 나머지는 대부분은 平民이거나 中人이었다. 본래 양반사대부는 전체 인구의 5% 남짓이었다. 그러던 것이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등의 전쟁 이후, 혼란기를 틈타 신분 세탁을 하여, 조선왕조 후기에는 양반의 숫자가 급격히 증가한다. 그러니 현대인의 절대다수가 양반의 후예가 아니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더욱이 현대사회는 조선왕조가 이미 몰락해버린 시절인데도, 여전히 兩班家이고자 하는 심리상태는, 참으로 기괴할 따름이다. 이 글을 읽는 그대의 집안도 상놈집안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祖上이 농민이나 노동자로서 상놈이란 사실이 부끄럽고 싫은가. 그러면서도 平等이나 人權 따위를 논할 때에는, 농민이나 노동자 편에 서서 주저없이 양반을 욕한다.
梅泉의 시대로부터 다소 세월이 흐른 후, 양반사대부에 대해 어떤 판단을 해야 할 상황이 되면, 필자로서는 어쩐지 매천을 回想케 된다. 매천이야말로, 조선왕조를 통털어 몇 안 되는, 양반다운 양반이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런 그의 양반다움이, 결국 그의 삶을 자살의 비극으로 이끌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탓에, 그의 비극은 지극히 美學的이며, 삶 자체로서 顯現해낸 가장 숭고한 예술작품이라고 여겨진다.
다음은 中國人인 江謙이 쓴 梅泉集 序文의 한 대목이다.
-하략-

저자소개

다음은 역시 중국인 黃開基가 쓴 梅泉續集 서문이다.

""箕子가 周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고, 朝鮮으로 온 뒤로부터 洪範九疇의 道가 동방에서 이루어졌다.
그 뒤로 그 遺風과 餘澤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아, 歷代로 내면이 어질고 외면이 훌륭한 인물들이 연이어 나왔다.
지금의 韓國 사직에서는, 또 창강과 매천의 문장이나 절의를 통해, 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창강은 幾微에 밝고 선견지명이 있는 사람이라, 관직을 버리고 남쪽으로 갔다가, 國運이 다해 갈 즈음에, 마침내 中華民國에 籍을 두고서, 스스로 少昊金天氏의 가문을 다시 열어, 그 망국의 슬픔을 잊고자 하였다.
그 결과 내가 그와 교유하며, 학문과 도를 논할 수 있게 되었으니, 저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매천의 경우에는 따져 보면, 나와 같은 黃帝의 후손인데, 창강을 따라 옛 本籍으로 돌아오지 않고, 寒貧한 布衣之士로서 도리를 지키는 일을 힘써 자임하였다.
그리하여 엿처럼 달게 독약을 마심으로써, 자신을 개결하게 지켰으니, 이는 불행 중에 더욱 큰 불행이라 하겠다.""

황개기(1790~1856)는 청나라의 정치가로서 중국인이다. 그런 그가 황현에 대해서 위와 같은 발언을 하는 것은, 아주 印象的이다. 황개기는, 기자가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 않고, 朝鮮으로 책봉되어 온 일을 거론한다. 그렇게 기자가 홍범구주를 전해 줌으로써, 조선에서 홍범구주의 정치가 실현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이러한 이해는 조선왕조에서도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황현과 자신이 黃帝 軒轅氏의 동일한 후손임을 주장한다. 이는 지극히 中華主義的 思惟方式의 發露라고 할 수 있다. 황제 헌원씨는 중국인에게 마치 조선의 檀君과 같은 존재다. 그런데 황현의 성씨가 黃氏라는 사실만으로 황제 헌원씨의 후손이라고 한 것이다. 여하튼 이는, 황현이 중국이라는 문명권에 편입되어야 할 인물이면서도, 마치 기자처럼 조선에서 생을 마쳤음을 비유함이다. 적어도 황현의 수준 정도는 되어야 문명적인 중국인일 수 있음을 내포하는 비유라고 할 것이다.
또한 황현이 조선의 멸망을 보면서, 스스로 자결한 忠節을 鼓舞的인 행위로 평가하며 칭송한다. 황현의 행위는 實利가 아닌 名分을 선택한 것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분을 위해 충절을 선택하는 것은, 조선왕조가 표면적으로 내세우는 대표적인 정치철학적 지향이었다.
조선왕조에서도 황현의 경우처럼, 적어도 자기의 목숨까지 바칠 정도라면, 나름대로 명분을 추구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외의 경우 대부분, 명분은 그저 실리의 도구로써 작동하기 십상이다. 현대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의 이득을 위한 삶은, 지극히 본성적인 차원에서 작동하는 심리기제이기 때문이다.
황현의 행위는 洪範九疇의 정치철학체계에서는, 後代에 군주의 권력을 標榜하는 모델로서 흔히 제시되는, 皇極의 원리를 좇는 행위인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정치적 상황이 황현이나 황개기의 바람과 같은 것은 아니다.
때문에 현재에 이르도록, 정치적 판단에 있어 명분과 실리는 여전히 늘 문제가 된다. 더욱이 조선왕조의 性理學的 정치철학은 지나치게 명분에 치중하며, 실리를 조화시킬 만한 정치이론이 정립되어 있지 못 하다. 때문에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實學이 등장하기도 한다.
檀君朝鮮과 箕子朝鮮 등에 얽힌 古代史의 문제들은, 현대에 이르러 특히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그만큼 그 문제에 내재된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에 관한 上古史 재정립의 문제는, 역사문제라는 것이 결국은 정치철학의 문제라는 사실을 인식케 한다.
조선왕조에서는 기자조선을 역사적 事實로 규정했다. 그래서 기자의 홍범을 國是로서 활용했던 것이다. 그러한 政治史的 史實에 대해서, 조선왕조가 멸망하고 수십 년이 지난 후, 기자조선의 실체 자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고려왕조나 조선왕조에서는, 단군조선이나 기자조선의 眞僞에 대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왕조는 역사적 史料에 대한 인식이 다소 부족했다지만, 조선왕조는 역사에 대해 각별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러한 인식 탓에 예컨대, 세조 때는 受書令으로써 古記로 분류되는 일련의 서적들을 강제로 수거하여 없애버린다.
세조의 수서령은, 주로 기자조선의 역사를 事實로써 확정하는 데 장애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 歷史書를 대상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受書 대상 텍스트의 목록의 대강은 다음과 같다. 古朝鮮秘詞, 大辯說, 朝代記, 周南逸士記, 誌公記, 表訓三聖密記, 安含老元董仲三聖記, 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 文泰山ㆍ王居仁ㆍ薛業等三人記錄, 修撰企所 一百餘卷, 動天錄, 磨蝨錄, 通天錄, 壺中錄, 地華錄, 漢都讖記 等이다.
현재로서는 당시 逸失된 서적들에 기술되었던 내용을 확인할 방법은 없으며, 지목된 서적들의 제목으로써 유추할 때, 그 서적들의 대부분이 우리 민족의 上古史에 관련된 歷史書인 것으로 추정된다. 흔히 이러한 문제들은 역사적 史實의 문제이므로, 역사학의 所管인 것으로 판단하기 쉽다. 그러나 역사라는 것은, 역사학의 문제이면서 동시에 정치철학의 문제임을 인식해야 한다. 어떠한 역사적 事實이 歷史書에 史實로서 기술되어, 하나의 歷史가 정립되는 과정은 지극히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조선왕조의 半島史觀, 日帝의 植民史觀, 중국의 東北工程 등에 의한 역사는, 역사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정치를 위한 역사임은 周知의 사실이다. 흔히 조선왕조의 반도사관을 日帝 식민사관의 일종이라고 인식한다. 그러나 요동 정벌 명령에 抗命하며 위화도 회군이라는 정치적 결정을 하고, 중국에 대한 事大主義를 선언할 때 작동한 史觀이야말로 반도사관이다. 본래 우리 민족의 영토이던 요동을 포기하고서, 우리 영토를 록강 이남의 韓半島로 국한시켰기 때문이다.
일제는 그러한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歷史觀에 반도사관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반도사관과 식민사관 중의 반도사관은 뭉뚱그려질 수 없는 별개의 개념이므로, 명확히 분별하여 살피는 것이 타당하다.
식민사관은 19세기 말 도쿄제국대학에서 시작되었는데, 神功皇后의 新羅征服說과 任那日本府說, 滿鮮史論 등을 내세우다가, 20세기 초 朝鮮侵略이 본격화되자 日鮮同祖論, 他律性論, 停滯性論, 黨派性論 등을 제시하고 있다.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 이마니시 류(今西龍), 李丙燾 등이 대표자들이다.
일제의 朝鮮史編修會에 재직하던 申奭鎬는, 解放 이후 국사편찬회의 회장이 된다. 이후 이러한 계통을 잇는 植民史學派는 현재까지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美軍政, 左右對立, 韓國戰爭 등의 이유로 인해, 친일파 處斷을 엄정하게 실현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하략-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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