戰爭과 國際政治, 丙子胡亂과 南漢山城 그리고 仁祖
丙子胡亂 당시 南漢山城의 상황을 記述한 朝鮮王朝實錄의 記事를 보면, 수백년 전의 기록에 불과한데도, 실로 피눈물 나는 심정을 갖게 된다. 그런데 만약 우리 先祖들의 역사적 체험이 아니라면, 이처럼 직접적으로 체감되지는 않을 것이다.
예컨대, 아프리카에서 수백만명이 굶어죽는다는 뉴스를 들어도 그저 무덤덤하지만, 내 부모형제가 이런저런 질병에 걸렸다고 하면 온갖 근심을 하게 되는 것은, 人之常情인 탓이다. 마찬가지로 아프리카人들도,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생하여 수백만명이 죽는다는 뉴스를 들어도 그저 무덤덤할 터이다.
그런데 기괴하게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상황은, 마치 21세기 北韓의 모양을 보는 듯하다. 後金(淸)의 침략을 피해 궁궐과 首都를 잃어버리고서 남한산성에 숨어들었던 仁祖의 심정이나, 美國의 폭격을 피해 地下防空壕로 숨어드는 金正恩의 심정이나,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다음은 인조 15년 1월 3일, 조선왕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황제에게 보낸 降伏文書이다.
조선 국왕 姓 某는, 삼가 大淸 寬溫仁聖皇帝에게 글을 올립니다.
小邦이 대국에 죄를 얻어, 스스로 병화를 불러, 외로운 성에 몸을 의탁한 채, 위태로움이 朝夕에 닥쳤습니다. 專使에게 글을 받들게 하여, 간절한 심정을 진달하려고 생각했지만, 군사가 대치한 상황에서 길이 막혀 자연 통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듣건대, 황제께서 궁벽하고 누추한 곳까지 오셨다기에, 반신반의하며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였습니다. 이제 대국이 옛날의 맹약을 잊지 않고, 분명하게 가르침과 책망을 내려 주어 스스로 죄를 알게 하였으니, 지금이야말로 소방의 心事를 펼 수 있는 때입니다.
소방이 丁卯年에 和親을 맺은 이래, 10여 년간 돈독하게 우의를 다지고, 공손히 예절을 지킨 것은, 대국이 아는 일일 뿐만 아니라, 실로 皇天이 살피는 바인데, 지난해의 일은 소방이 참으로 그 죄를 변명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또한 소방의 신민이 식견이 얕고 좁아, 명분과 의리를 변통성 없이 지키려고 한 데 연유한 것으로, 마침내는 사신이 화를 내고 곧바로 떠나게 하고 만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소방의 군신이 지나치게 염려한 나머지, 邊臣을 신칙하였는데, 詞臣이 글을 지으면서, 내용이 사리에 어긋나고 자극하는 것이 많아, 모르는 사이에 대국의 노여움을 촉발시키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하들에게서 나온 일이라고 하여,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明나라는 바로 우리 나라와 父子 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전후에 걸쳐 大國의 兵馬가 關에 들어 갔을 적에, 소방은 일찍이 화살 하나도 서로 겨누지 않으면서, 형제국으로서의 맹약과 우호를 소중히 여기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이토록까지 말이 있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이것 역시 소방의 성실성이 미덥지 못해, 대국의 의심을 받게 된 데서 나온 것이니, 오히려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지난날의 일에 대한 죄는 소방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으면 정벌했다가 죄를 깨달으면 용서하는 것이야말로, 天心을 체득하여 만물을 포용하는 대국이 취하는 행동이라 할 것입니다.
만일 정묘년에 하늘을 두고 맹서한 언약을 생각하고, 소방 생령의 목숨을 가엾이 여겨, 소방으로 하여금 계책을 바꾸어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용납한다면, 소방이 마음을 씻고 從事하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대국이 기꺼이 용서해 주지 않고서, 기필코 그 병력을 끝까지 쓰려고 한다면, 소방은 사리가 막히고 형세가 극에 달하여, 스스로 죽기를 기약할 따름 입니다. 감히 심정을 진달하며 공손히 가르침을 기다립니다.
항복문서의 내용을 살피면, 그야말로 피가 끓는다. 그러나 전쟁에 패배하면 곧 罪人이며 奴隷일 따름이다. 그러한 상황은 21세기라고 해서 별다를 게 없다.
예컨대, 대한민국은 여전히 일본에 대해, 수십 년이 흐른 후에도 慰安婦 문제의 해결을 종용하고 있다. 그런데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 등 敗北國들의 여성들은, 지금 이 순간 貧困 따위에 내몰려 賣春女로 내몰리고 있다. 그런 것이 여전히 人類史를 작동시키는 戰爭이라는 참으로 가혹한 動力이다.
병자호란은 아득히 멀어진 과거의 역사 속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無法律의 國際政治 場에서 전쟁은 결코 과거일 수 없다. 우리 민족으로서, 가깝게는 한국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인 전쟁이다. 더욱이 현재의 時局은, 북한 핵문제나 美中 무역전쟁 혹은 패권전쟁으로 인해 一觸卽發의 戰爭的 상황에 있다. 여차하면 남한산성의 비극과 같은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는 것이다.
조선왕조의 인구 중 통상 40% 가량이 奴婢였다고 한다. 가혹한 신분제도 탓에, 백성의 大多數는 막상 戰亂이 발생해도 굳이 불안해 할 까닭은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발생했다고 해서, 노비의 형편보다 더 나빠질 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청나라의 침략에 勞心焦思한 것은 王室과 士大夫 등의 기득권 세력이었다. 다만, 이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일 따름이다. 어쨌거나 감성적인 측면에선, 우리 선조들의 고통이 그대로 전해져옴은 不得已다.
그런데 조선왕조에서 노비로서 생존하는 일과 청나라에 끌려가 戰爭奴隷로서 살아내는 일 중, 어떤 것이 더 힘겨웠을까. 현실세계에서 별로 가진 것이 없거나, 더 이상 형편이 나빠질 것 없을 때, 인간존재는 혁명적인 誘惑에 쉬이 眩惑된다. 근대사회에서 극심한 빈곤에 시달리던 勞動者나 小作農이나 農奴들이 플로레타리아혁명에 적극 동참한 역사적 史實이 이를 傍證한다.
그래서 어느 시대, 어느 국가라도, 항상 養民이 강조되는 것이다. 양민이란 백성을 먹여 살리는 일이며, 이것이 곧 政治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이러한 인식은 이미 書經의 시대로부터 常存한다. 서경 중에서도 洪範九疇는 특히 그러하다. 그리고 조선왕조는 그러한 홍범구주를 國是로 삼는 국가공동체였다. 그러나 그저 허울 좋은 이념일뿐, 실제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백성의 절반 가까이가 노비였으니까 말이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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