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의 사유思惟를 찾아서
여행자에게 노자철학은,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사유(思惟)를 찾아 나서는 여행이었으며, 그것은 저 먼 고대(古代)로의 여행이었다.
그 여행은 시대와 상황 안에서, 그림자권력의 조작적인 왜곡과 은폐에 의해 부득이하게 상실해버린, 어떤 본래적인 사유체계와 사유방식을 찾아나서는 사유여행이었다.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사유의 역사 안에서 기성의 사유체계를 전도(顚倒)함으로써, 노예적 도덕주의와 현대적 허무주의에 의해 전도되어버린 본래적인 사유체계의 회복을 목적하는 사유여행을 떠났었다. 그것은 영원히 회귀하는, 가장 위대한 긍정의 예술가적인 힘 의지로의 복귀였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그림자권력적인 도구적 이성에 의해 조작되고 은폐되어 소외되고 배척되어버린, 본성적 광기(狂氣)의 정체를 찾아서 계보학적인 사유여정을 떠났다. 그것은 집단권력적인 이해(利害)의 논리에 의해, 반(反)체제적이며, 반(反)이데올로기적이며, 반(反)사회적인 개별자들을 조작적으로 이상(異常)이나 비정상(非正常)으로 규정함으로써, 집단의 그림자권력을 유지하고 지속하려는 획책을 밝혀 드러냄이었다.
니체나 미셸 푸코의 사유여행은, 인류사를 주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그림자권력적인 주류적 철학사상에 의해, 부득이하게 은폐되고 상실되어버린, 어떤 본래적인 사유체계와 사유방식을 찾아 떠나는 사유여행이었다.
그들이 그러한 사유여행을 떠났던 까닭은, 우리가 그림자권력의 조작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상실해버린 본래적인 사유체계와 사유방식이야말로, 인간존재의 본래 자리를 알도록 해주는 참된 사유의 본성적인 원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권력자들은, 시대와 상황 안에서 그림자권력적인 이해만을 좇아, 본래적인 사유체계와 사유방식을, 철저히 부정과 저항과 신비와 반역과 이단과 혼돈과 퇴폐와 변절과 몰락 따위를 목적하는 것으로나 규정하고서는 배척해버린다.
그러다보니 어느 집단공동체에서든, 어떤 본래적인 사유를 추구하는 탓에, 자꾸만 그림자권력이 이미 규정해둔 온갖 것을 의심하며 의문을 제기하는 자라면, 그림자권력에 의해 금세 소외되고 추방되어야 할 대상으로 분류되어버린다.
그런데 어떠한 형태의 철학이든, 가장 원래적인 회의주의적 소피스트(Sophist)였던 소크라테스(S?krat?s)의 철학함처럼, 바로 그러한 본래적인 것에 대한 의심과 의문에서 시작됨은 명약관화(明若觀火)다.
그런 탓에, 집단공동체의 역사 안에서 그림자권력적인 체제원리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비판하며, 본래적인 사유를 추구하는 대부분의 반체제적인 반성향의 철학자들은, 부득이하게 강제되는 깊은 고독 속으로 자의반타의반 고립되고 만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이미 상실되어버린 본래적인 사유의 역사 안에서, 한없는 고독과 은둔과 고립의 삶을 살아내면서도, 의연히 오롯한 자기의 길을 걸었던 수많은 철학자들을 보게 된다.
본래적인 철학함은, 현실세계와 이상세계의 비동시적인 동시적 지평 위에서, 무소의 뿔처럼 오롯이 홀로 가는 사유세계로의 여행이다.
때문에 동서양의 철학사상사에는, 현대적인 일군의 사회학자나 생물학자들이 지향하는 바처럼, 일정한 집단을 이룸으로써 철학했던 철학자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철학함으로써 정립된 철학사상이 실천되고 실현되는 과정에서 여러 이유로 부득이하게, 예컨대 공자(孔子)의 칠십이현(七十二賢)이나 플라톤(Plato)의 아카데메이아(Acad?meia)처럼, 일정한 학문공동체를 형성하는 탓에, 마치 애당초 철학함 자체가 집단적인 행위로써나 가능한 것으로 오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철학함 자체는, 철저히 홀로 가는 고독한 여행길이다. 그리고 그 종착지로서의 철학적 고향은, 항상 어디에도 없는 고향[無何有之鄕]으로서의 유토피아일 수밖에 없다.
노자는, 천지자연의 온 존재와 온갖 것의 생성(becoming)에 대한 논변을 자기 철학의 바탕으로 삼는다.
생성은, 이 우주 자체를 포함한 모든 사물이 생겨나서 자라나고, 변화하여 소멸하는 과정 전부를 의미한다. 특히, 어떤 존재자로서의 사물이, 일정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의 것으로 변화적으로 이동하는 운동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림자권력의 주류철학이 위주로 삼는, 정지나 불변이나 존재에 대립하는 철학원리다.
모든 것이 스스로 · 저절로 다른 것으로 변화되어 간다는 인식은, 모든 것이 동일한 상태에 머문다고 인식하는 존재의 고정성에 대립한다. 때문에 서양철학에서 생성(Werden)과 존재(Sein)의 관계는, 고대 그리스철학 이래 철학적인 근본 문제 중 하나였다.
예컨대, 엘레아(Elea)학파의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변화적 운동을 부정하고, 영원히 부동(不動)하는 어떤 궁극의 존재를 세계의 본질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이데아의 사유방식은 플라톤 이후, 현대에 이르도록 서양철학을 주도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는, 자연 그 자체를 부단한 자기(自己)운동의 과정으로 파악하고서,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사유방식은, 서양철학 안에서 늘 주변적이고 부수적인 지위에 배치되었을 따름이다.
그런데 동양철학은 애당초 변화의 사유방식에 토대를 두고 있다. 이에 동양철학의 시원이라고 볼 수 있는, 주역(周易)철학의 음양(陰陽)의 사유방식이 대표적으로 언급될 수 있다. 플라톤의 이데아의 사유방식이 서양철학을 주도하는 것처럼, 주역의 음양의 사유방식은 동양철학을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역철학의 음양의 사유방식은 생성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주역철학이 말하는 생성의 방식은, 음(陰)과 양(陽)의 생성과 소멸이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변화[易] 그 자체다.
그러한 동시적 생성으로서의 변화를, 노자는 유(有)와 무(無)가 동시적으로 공존하며, 스스로 · 저절로 그러하게[無爲] 변화하는 자연(自然)의 사유방식으로써 설명한다.
변화와 자연은 모두 생성을 사유하는 방식이다. 그러한 생성은 이미 소멸을 동시적으로 내포하는 생성이다. 단지 시작으로서의 생성만이 아니라, 끝으로서의 소멸이 동시적으로 작동하는 생성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의 현실세계야말로 참된 진실의 세계인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소멸과 분리된 새로운 생성이 이데아와 같은 천국에서 새로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세계에서 소멸과 동시에 또 다른 생성이 동시적으로 시작된다고 인식함이다.
이러한 사유법이 동아시아 문화권의 고유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서양철학적인 사유방식에 익숙해진 현대인으로서는 쉬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동양철학의 생성적 사유방식은, 현대에 이르러 한계점에 다다른 기존의 서양철학에 대한 스스로의 생성적 변화의 대안적 모색으로서 제기되는 포스트모던(post-modern)철학의 주장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생성철학의 시원적 본령을 이미 내함(內含)하고 있는 노자의 생성철학은, 21세기 세계철학의 새로운 지향이 되어줄 수 있는 현대철학으로서 제시될 필요가 있다고 할 것이다.
지은이 탁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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