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난파의 인생관을 알게 해주는 짧은 수필이 한 편 있습니다. 개화기,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을 감안할 경우, 그의 변화가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일한 시기를 산 사람들 중에 변화 없이 한 방향으로만 살았던 이들도 있었지요. 다음의 짧은 글을 통해 그의 음악관, 예술관, 인생관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홍난파에게 접근하는 일종의 열쇠입니다.
[죽어서는 손해]
어떤 날 격렬한 내외 싸움을 한 로시니는 노발대발하여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부인은 부인대로 역시 노기충천하여, 곧 2층으로 뛰어 올라가서는, 창문을 열어젖히고, 그 아래 서 있는 자기 남편의 앞에 떨어져 죽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어버리면 분풀이는 될는지 몰라도 자기에게만 손해라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자, 부인은 아무 정신없이 자기의 만느칸[마네킹형의 옷걸이]을 창 밖으로 집어 던졌습니다. 그러자 로시니의 노기도 그만 풀려 버렸다고 합니다.
흔히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고 합니다. 난파가 강자다 아니다 위대하다 아니다 하는 논쟁보다, 그 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 한 예술가, 한 음악가의 내면에 흐르는 큰 강이 바로 생존에 대한 열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짧은 수필이네요. 그리고 그 열망의 핵은 음악이리라고. 그가 어떤 음악적 여정을 밟았는지 차분하게 살펴보죠.
한국의 슈베르트라고도 불렸던 홍난파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이자 지휘자, 음악평론가로 일제 강점기에 명성을 날렸다. 본명은 홍영후(洪永厚)이며, 아호가 난파(蘭坡)이다. 〈봉선화〉,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 생각〉등의 가곡과 〈오빠생각〉, 〈나뭇잎〉, 〈개구리〉 등의 동요를 작곡했다.
국악에 조예가 깊은 부친의 영향을 받아 수원에서 자라며 국악기를 배웠고, 서울로 올라온 후 서양음악을 접하게 된다. 1910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 1912년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음악부 성악과, 1918년 일본 동경 우에노[上野] 음악학교 예과(預科), 1931년 미국의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 등을 거치며 음악공부를 한다. 뿐만 아니라 1919년 동경에서 예술 잡지인 삼광 창간, 1922년 음악잡지 《음악세계》 창간, 1925년 잡지 음악계 창간, 1938년 음악잡지《음악만필》 발행 등 음악 평론가로서의 활동도 지속한다.
그러나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른 후, 사상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고 친일 음악인이 되고 만다. 일제의 애국가요대회에서 정의의 개가, 공군의 가(歌)를 발표하고, 친일 문학인인 이광수의 시에 곡을 붙여 희망의 아침을 발표한다. 한편 홍난파의 친일에는 자발성이 없다고 보고 그를 친일 음악인으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1941년 8월 30일에 뇌결핵으로 사망한다.
제1부 음악 일반론
1. 음악이란 무엇인가.『삼광』 창간호 / 1919년 2월
2. 동서양음악의 비교『신동아』 1936년 6월호
3. 서양음악을 어떻게 들을까(1)『조선일보』 1929년 9월 8일
4. 서양음악을 어떻게 들을까(4)『조선일보』 1929년 10월 10일
5. 양악조선(洋樂朝鮮)의 요람시대『조광』1939년 8월호
6. 음악과 계급의식『동아일보』 1931년 1월 29~ 2월 1일
제2부 음악 각론
1. 관현악 이야기『개벽』 1923년 3월호
2. 가극 이야기『개벽』 1923년 1월호
3. 가극의 기원과 그 발달『개벽』 1923년 2월호
4. 재즈 음악에 대하여『조선일보』 1938년 2월 27일
제3부 음악 에피소드
1. 가극왕 바그너1938년
2.〈호접부인(胡蝶夫人, 나비부인)〉1938년
3. 로렐라이의 유래1936년
4. 마왕(魔王)의 작곡1938년
5. 셰익스피어와 음악『음악평론』 1936년 5월호
6. 영웅 교향곡(英雄 交響曲)1938년
7. 월광소나타1919년
8. 유모레스크『조선일보』 1931년 2월 20~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