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끈한 사나이 견훤의 한판 복수극, 김동인은 견훤이 신라의 경애왕을 살해한 것을 통쾌함으로 기록한다.
927년 견훤은 실제로 신라의 수도 경주로 쳐들어가 경애왕을 죽인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조에 ""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진(自盡)하게 하고 왕비를 강음(强淫)하고, 부하로 그 비첩(妃妾)들을 난통케 하고..."" 기록되어 있다.
대부분의 역사는 쇠약해진 신라가 고려 왕건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자, 견훤이 이에 불안을 느끼고 신라에 응징한 것이라 하지만 김동인은 이 사건을 견훤 평생의 숙원으로 연결시킨다.
즉 견훤을 ""백제 의자왕의 제10대손""으로 묘사해 의자왕이 당했던 그 수모를 경애왕한테 그대로 복수하는 것으로 소설의 흐름을 잡아간다. 삼국사기에 있는 내용대로 그 비첩들을 짓밟는 만행을 저지른 것은 견훤이 삼천궁녀의 치욕을 씻기 위해서라고 이야기한다.
당시 일본의 나라 침탈을 슬프게만 바라보는 시각이 아닌 적극적으로 복수를 하자는 강렬한 의지를 담은 소설이라 하겠다.
김동인은 1900년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평양에서 소학교를 나온 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와 가와바타 미술학교(川端畵學校)에서 수학하였다. 유학 생활을 통해 일본의 자유분방한 문학활동을 접한 그는 문학을 필생의 과업으로 삼고 쉬지 않고 소설을 창작했다. 1919년 주요한(朱耀翰), 전영택(田榮澤), 최승만(崔承萬), 김환(金煥) 등과 함께 최초의 문학동인지인 『창조』와 『영대』를 발간하였다. 『창조』 창간호에 처녀작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한 후, 마음이 옅은 자여, 목숨, 배따라기, 감자, 태형과 같은 작품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작가적 위치를 확고하게 다졌다. 1919년 3월에는 아우 김동평(金東平)의 31운동 격문을 써준 것이 발각되어 출판법 위반 혐의로 4개월간 투옥되었다. 1925년에는 명문, 감자, 시골 황서방과 같이 자연주의적 인생관을 드러내는 일련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1929년 한국문학사에서 근대소설의 성립과 그 발전 과정을 역사적으로 정리한 조선근대소설고를 발표하였고, 이듬해에는 광염 소나타, 광화사와 같은 유미주의 계열의 단편을 발표하였다. 한때 방탕한 생활에 빠져 지내다 결국 파산에 이른다. 재혼을 계기로 서울에 다시 터전을 잡은 그는 신문연재소설을 쓰게 된다. 역사소설에도 재능을 발휘하여 대수양, 젊은 그들, 운현궁의 봄, 왕조의 낙부 등을 발표하였다. 김동인은 문인들에게 친일행위를 강제하는 시대적 압박에 지쳐 매우 병약해진 상태로 해방을 맞았다. 그러나 건강이 악화되어 결국 중풍으로 쓰러져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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