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조 작품 모음집이다. 작품집이다. 또한 기사를 모아서 인물에 대한 정보를 더했다. 백과사전 등에서 소개하는 것도 많은 정보가 있지만 비하인드 스토리가 기사에 있으며 주관적 견해도 재미를 더한다.
이해조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정치소설적 형태로부터 후기로 올수록 점차 대중적인 흥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하여, 당대의 풍속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어릴 적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19세에는 초시에 합격했으며, 25, 6세 무렵에는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한시를 즐기던 유학자들의 모임)를 주관했다. 한학자로서의 이러한 모습은 「잠상태(岑上苔)」(1906), 「윤리학」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일본어를 독학하여 「철세계」(1908), 「화성돈전」(1908), 「앵속화 제조법」 등을 번역했고, 『제국신문』, 『황성신문』, 『매일신보』에 근무했으며, 1908년 대한협회 교육부 사무장, 실업부 평의원, 기호흥학회 평의원, 『기호흥학회월보』 편집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양기탁?주시경?이준?노익형 등과 함께 광무사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59세가 되던 1927년 5월 11일 포천에서 병사했다. 현재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사창동 뒤 낙춘군묘 동쪽에 묘소가 있다. 미완의 한문소설 「잠상태」(1906)를 쓴 이후 신소설 창작에도 임하여 「강명화실기」(1925)에 이르기까지 4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정치소설적 성향의 토론체 소설 「자유종」(1910), 동학봉기를 소재로 하여 「춘향전」의 모티프를 차용한 「화의 혈」(1912), 미신타파를 주장한 「구마검」(1908), 추리소설적 요소를 지닌 「구의산」(1912)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 외에도 「빈상설」(1907), 「홍도화」(1908), 「원앙도」(1909), 「만월대」(1910), 「쌍옥적」(1911), 「화세계」(1911), 「월하가인」(1911), 「모란병」(1911), 「소양정」(1912), 「춘외춘」(1912), 「탄금대」(1912), 「홍장군전」(1918) 등의 작품이 있다. 한편, 명창 박기홍?심정순?곽창기 등의 구술을 산정하여 판소리계 소설들을 새로이 개작하기도 했는데,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등을 개작한 「옥중화」(1912), 「강상련」(1912), 「연의 각」(1913), 「토의 간」(1916) 등이 그것이다. 시조집 『정선조선가곡』(1914)도 주목할 만하다.
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정치소설적 형태로부터 후기로 올수록 점차 대중적인 흥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으며, 특히 당대의 풍속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해조는 이인직과 최찬식의 중간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택한 이와 같은 창작태도는 논자에 따라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화의 혈」 등에 나타난 소설에 대한 그의 견해는 문학사적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 부록 -
작가 소개
▣ 주요기사모음 -
◈ 세계의 명언 모음집 - 천개가 넘는 귀중한 명언이 있습니다. (두고두고 읽는 명언)
이해조 [李海朝], 1869-1927년. 호 동농(東濃), 이열재(怡悅齋), 소설가
저서(작품) 화의 혈, 탄금대, 철세계, 옥중화, 강상련, 모란병, 우중행인
이해조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정치소설적 형태로부터 후기로 올수록 점차 대중적인 흥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하여, 당대의 풍속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호는 열재(悅齋), 이열재(怡悅齋), 동농(東濃). 필명으로는 선음자(善飮子), 하관생(遐觀生), 석춘자(惜春子), 신안생(神眼生), 해관자(解觀子), 우산거사(牛山居士).
1869년 2월 27일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신평리 121번지에서 이철용(李哲鎔)과 청풍 김씨의 장남으로 출생. 본관은 전주 서울로 이주한 후에는 대부분의 생애를 임낭굴(현재 익선동), 와룡동, 도렴동 등지에서 살았다. 어릴 적부터 한학을 수학하여 19세에는 초시에 합격했으며, 25, 6세 무렵에는 대동사문회(大東斯文會-한시를 즐기던 유학자들의 모임)를 주관했다. 한학자로서의 이러한 모습은 「잠상태(岑上苔)」(1906), 「윤리학」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일본어를 독학하여 「철세계」(1908), 「화성돈전」(1908), 「앵속화 제조법」 등을 번역했고, 『제국신문』, 『황성신문』, 『매일신보』에 근무했으며, 1908년 대한협회 교육부 사무장, 실업부 평의원, 기호흥학회 평의원, 『기호흥학회월보』 편집인으로 활약하는 한편 양기탁‧주시경‧이준‧노익형 등과 함께 광무사를 조직하여 국채보상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59세가 되던 1927년 5월 11일 포천에서 병사했다. 현재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사창동 뒤 낙춘군묘 동쪽에 묘소가 있다. 미완의 한문소설 「잠상태」(1906)를 쓴 이후 신소설 창작에도 임하여 「강명화실기」(1925)에 이르기까지 40여 편의 작품을 발표했다. 정치소설적 성향의 토론체 소설 「자유종」(1910), 동학봉기를 소재로 하여 「춘향전」의 모티프를 차용한 「화의 혈」(1912), 미신타파를 주장한 「구마검」(1908), 추리소설적 요소를 지닌 「구의산」(1912) 등이 그의 대표작이다.
그 외에도 「빈상설」(1907), 「홍도화」(1908), 「원앙도」(1909), 「만월대」(1910), 「쌍옥적」(1911), 「화세계」(1911), 「월하가인」(1911), 「모란병」(1911), 「소양정」(1912), 「춘외춘」(1912), 「탄금대」(1912), 「홍장군전」(1918) 등의 작품이 있다. 한편, 명창 박기홍‧심정순‧곽창기 등의 구술을 산정하여 판소리계 소설들을 새로이 개작하기도 했는데,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등을 개작한 「옥중화」(1912), 「강상련」(1912), 「연의 각」(1913), 「토의 간」(1916) 등이 그것이다. 시조집 『정선조선가곡』(1914)도 주목할 만하다.
소설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그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정치소설적 형태로부터 후기로 올수록 점차 대중적인 흥미를 강조하는 쪽으로 변하고 있으며, 특히 당대의 풍속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이해조는 이인직과 최찬식의 중간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택한 이와 같은 창작태도는 논자에 따라 상반된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화의 혈」 등에 나타난 소설에 대한 그의 견해는 문학사적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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