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가격, 이윤』 [ 賃金價格利潤 , Lohn, Preis und Profit ]
출간시기- 1865년
1865년 6월 20일과 27일에 맑스가 국제노동자협회(인터내셔널)의 중앙평의회에서 행한 강연 초고(영문). 맑스 사후, 1898년에 딸인 엘리노어에 의해 간행되며, 같은 해 E. 베른슈타인의 번역으로 『노이에 차이트』지에 위 표기의 표제로 게재되었다. 그것은 같은 중앙평의회 멤버 가운데 한 명인 영국의 오언주의자 존 웨스턴의,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는 물가의 상승을 초래할 뿐으로 유해하다는 의견에 대해 그 논거의 임금기금설 등을 비판하고, 임금률의 일반적 상승은 이윤율의 일반적 저하를 초래할 뿐 물가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이러한 물가나 임금의 기초범주로서의 상품일반의 가치와 노동력 상품의 가치, 후자에서의 역사적 사회적 요인 및 노동과 노동력의 구별의 중요성, 더 나아가서는 그것들에 기초하여 잉여가치의 법칙(절대적 · 상대적 잉여가치)과 자본축적의 일반법칙 등 당시 맑스 자신이 집필 중이었던 『자본』 제1권의 요점을 평이한 언어로 설명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호황 국면에서의 노동자계급의 임금인상 투쟁은 불황 국면에서 강요당한 임금인하의 보완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결국에는 노동과 자본 간의 힘 관계로 결정되고, 그 때문에도 노동조합은 '유해'하기는커녕 '유익'하며, 그것의 단결에 의해 임금인상을 획득하고 나아가서는 그 기초인 '임금제도' 그 자체의 '최종적 폐지'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이야기한다. 맑스 경제학의 뛰어난 입문서이다.
-야마나카 다카지(山中隆次)
(맑스사전, 2011. 10. 28., 도서출판 b)
칼 마르크스 [ Karl Heinrich Marx ]
주요저서 자본론《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conomie》
독일의 경제학자·정치학자. 헤겔의 영향을 받아 무신론적 급진 자유주의자가 되었다. 엥겔스와 경제학 연구를 하며 집필한 저서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을 정립하였으며, 《공산당선언》을 발표하여 각 국의 혁명에 불을 지폈다. 《경제학비판》, 《자본론》등의 저서를 남겼
라인주(州) 트리어에서 유대인 그리스도교 가정의 7남매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변호사로 자유사상을 지닌 계몽주의파 인물이었고, 어머니는 네덜란드의 귀족 출신이었다. 자유롭고 교양 있는 가정에서 성장하여 1830∼1835년 트리어김나지움(고등학교)에서 공부한 다음, 1835년 본대학교에 입학하여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미술사 등 인문계 수업을 받았다. 1년 후 본을 떠나 1836년 베를린대학교에 입학하여 법률·역사·철학을 공부하였다.
당시 독일의 철학계에서 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G.W.F.헤겔의 철학을 알게 됨으로써 마르크스는 젊은 신학(神學) 강사 B.바우어가 이끌던 헤겔학파의 좌파인 청년헤겔파에 소속되어 무신론적 급진(急進) 자유주의자가 되어 갔다. 1841년 에피쿠로스의 철학에 관한 논문으로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본으로 갔으나, 바우어가 대학에서 해직되는 것을 보고 대학 교수의 꿈을 포기하였다.
마르크스는 1842년 1월 새로 창간된 급진적 반정부신문인 《라인 신문》에 기고를 시작하여 그해 10월에 신문편집장이 되었으나, 여러 현실문제를 취급하는 과정에서 경제학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다. 1843년 관헌에 의하여 《라인 신문》이 폐간되자 프로이센 귀족의 딸로 4살 연상인 W.예니와 결혼하여, 파리로 옮겨가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프랑스의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 1842년에 처음 만났던 F.엥겔스와 파리에서 재회하였으며, 엥겔스의 조언에 의하여 경제학 연구에서의 영국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A.루게(1802∼1880)와 《독불년지(獨佛年誌)》를 출판하였으며, 이로 인해 프로이센 정부의 요청으로 파리에서 추방되어 1845년 2월 브뤼셀로 가서 프로이센 국적을 포기하였다. 그 동안 1844년 《경제학·철학 초고(草稿)》와 《헤겔 법철학 비판서설(法哲學批判序說)》을, 1845년 엥겔스와 공동으로 《신성가족》과 《독일 이데올로기》를 썼으며,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유물사관의 주장을 처음으로 정립·설명하였다. 1847년 P.J.프루동(1809∼1865)의 《빈곤의 철학》을 비판한 《철학의 빈곤》을 쓰고, 그해에 런던에서 공산주의자동맹이 결성되자 엥겔스와 함께 이에 가입하여 동맹의 강령인 《공산당선언》을 공동명의로 집필하였는데 이 선언은 그해 2월에 발표되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혁명이 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 제국에 파급되자 마르크스는 브뤼셀·파리·쾰른 등지로 가서 혁명에 참가하였으나, 각국의 혁명은 좌절되고 그에게는 잇달아 추방령이 내려졌다. 그는 마침내 런던으로 망명하여 수년간 고립생활을 하게 되었다. 1850~1864년까지 마르크스는 정신적 고통과 물질적인 빈곤 속에서 지냈다. 대영박물관 도서관에 다니면서 경제학을 연구하는 한편, 1851년부터 미국의 《뉴욕 트리뷴》지(紙)의 유럽 통신원이 되었다. 이 때 맨체스터에서 아버지의 방적공장에 근무하고 있던 엥겔스가 마르크스에게 재정적 원조를 계속하였으며, 마르크스 부인의 친척과 W.볼프(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이 사람에게 바침) 등의 유산(遺産)을 증여받아 마르크스 일가는 경제적 곤란을 덜었다.
1859년 경제학 이론에 대한 최초의 저서 《경제학비판》이 간행되었는데, 이 책의 서언(序言)에 유명한 유물사관 공식이 실려 있다. 1864년 제1인터내셔널이 창설되자 마르크스는 이에 참여하여 프루동, F.라살(1825∼1864), M.A.바쿠닌(1814∼1876) 등과 대립하면서 활동하는 한편, 1862년부터 구상 중이던 《자본론》 제1권을 1867년 함부르크에서 출판하였다. 그러나 제2권과 제3권은 마르크스의 사후에 엥겔스가 1885년과 1894년에 각각 출판하였고, 처음에 제4권으로 구상되었던 부분은 K.카우츠키에 의하여 1905∼1910년에 《잉여가치학설사(剩餘價値學說史)》라는 이름의 독립된 형태로 출판되었다.
마르크스의 마지막 10년은 자신의 말대로 만성적인 정신적 침체에 빠져 있었으며, 최후의 수 년 동안은 많은 시간을 휴양지에서 보냈다. 1881년 12월에는 아내의 죽음으로, 1883년 1월에는 장녀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은 그는 그해 3월 14일 런던 자택에서 평생의 친구이자 협력자인 엥겔스가 지켜 보는 가운데 64세로 일생을 마쳤다.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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