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무심한 저녁이었다.
가랑비가 먼지처럼 가늘게 흩어졌다.
사무실에 혼자 있던 나는 가방도 챙기지 않고 터덜터덜 밖으로 기어나왔다.
가랑비가 티셔츠 사이로 소리 없이 밀고 들어왔다.
시원했다.
그날 나는, 내가 곧 이 치열한 마감 전선에서 물러날 것임을 예감했다.
내 병은 내가 잘 알고 있었고, 처방전도 이미 가지고 있었다.
“너무 오래 현실에 머물렀던 거야. 이젠 좀 더 용감해지고 싶어.”
가랑비 사이를 한참 걸어다니던 서른여섯 살 여자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래, 이제 떠나는 거야! 어디로든, 아무렇게나.”
반듯했던 삶에 일부러 흠집을 내고 떠난 배낭여행
지금 필요한 건 호흡을 고르고 나를 사랑해 주는 일이다!
졸업 후 처음 쓴 이력서로 멋모르고 사회생활을 시작, 영화잡지 『스크린』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지냈다. 공짜로 영화 보고 감독이나 배우와 수다 떠는 재미에 푹 빠져 있던 어느 날, 문득 ‘일관되게 시시한 내 삶을 조금 비틀어보고 싶다’는 철없는 이유를 대고 덜컥 사표를 제출했다. 주체할 수 없이 시간이 많아진 그녀는 난생 처음 잡아보는 DSLR 카메라를 들고 지구 곳곳으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녀에게 주어진 특명은 1년간 아무 생각 없이 놀아보는 것, 세계 곳곳에 나만의 산책로를 만들어보는 것, 남의 나라에 맘에 드는 단골 카페를 여럿 만드는 것. 그리하여 가진 돈을 다 쓸 때까지는 ‘길 찾기 놀이’를 그만두지 않겠다 선언한 그녀는 스스로 ‘산책하는 여행자’라는 명함을 붙이고 이 나라 저 나라 생각나는 대로 정신없이 쏘다녔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일상으로 회귀, 영화 및 여행 칼럼을 쓰며 비틀어졌던 삶을 다시 펴고 있다. 매일 밤 새로운 여행 코스를 짜는 발칙한 버릇을 멈추지 않으면서.
prolog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