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가족은 일본에서 13년이나 살다가 해방된 조국에 돌아가야 한다는 중부님의 지시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형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연락선을 타고 귀국했다고 하겼다.
어머니는 일본에 집이랑 가재도구를 두고 온 것을 늘 아쉬워 하겼다. 1945년 8월 3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을 때는 다리 밑 강물에 들어가 목만 내놓아도 뜨거웠다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자라왔다.
멍석에 말리는 곡식을 쪼아 먹는 닭을 쫓을 때 ''고라고라''하던 말이며 일본에서 신던 어머니의 우단 하이힐을 우리나라에 돌아와서는 신을 수 없어 놓아둔 것을 어릴 때 멋을 내고 싶어 신어 보기도 하였다. 일본에서 가져온 범랑 세수 대야로 늘 세수를 하였던 기억도 난다. 1975년경에 우리나라에도 범랑 남비며 그릇들이 나와서 신부들은 혼수로 장만하여 시집갔다. 어릴 때부터 여러 가지 들은 이야기들로 낯설지 않은 이렇듯 알게 모르게 몸속에 입력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러 일본 여행길을 나선다.
시인이면서 시 낭송가이다. 한국문인협회 회원, 한국문인협회 용인문단 회원, 용인여성문학 회원, 자유문예 이사, 한국작가협회 회원, 창작과의식작가회 자문위원, 국제문화예술협회 시낭송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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