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가 탕탕 장단만 치면 그대로 판소리가 될 것 같다. 그만큼 리듬이 살아 있다. 판소리의 ‘아니리’처럼 이야기하듯 엮어나가는 지문, 육자배기 한 곡조를 들은 것 같은 애환서린 가락, 읽다 보면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비유 등이 한마당으로 어우러진 소설이다.
호남평야의 농투성이로 살아가는 뻗정다리 종두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산업단지가 들어서게 되면서 평생 농사를 짓던 노인들이 하나 둘 고향을 떠나야 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고향을 떠나기도 전에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버린 성구 황새. 자식 따라 서울로 가서 애보기가 되는 ‘오리’…….
뻗정다리 종두에게는 ‘소귀신’이 달라붙어 있다. 소 울음이 끊이지 않고 귓전을 맴도는데 이 소는 종두의 부친과 함께 파묻혀 죽은 소다. 가뭄에 논물 대려고 샘을 판 구덩이에 종두 부친이 깔려죽는다. 샘가에 소를 묶어놓고 구덩이를 판 게 화근이었다. 쌓아놓은 흙덩이를 소가 무너뜨려 흙에 깔려 죽은 것이다. 시래기죽, 보리죽으로 연명하며 농사지어 소작료 바치고, 일만 하다 세상을 떠난 원통한 죽음이다. 뿔도끼로 정수리를 쳐서 소 역시 무너진 샘 자리에 묻는다. 종두 부친과 죽은 소는 일평생 일만 하다 죽은 농사꾼의 상징이다.
종두는 홀아비다. ‘형수님의’ 중신으로 선을 보고 ‘온양댁’과 혼인을 한다. 온양댁 역시 계모 밑에서 고생하다 식모살이로 이집 저집을 떠돌다 종두를 만나 짧은 행복을 잠시 누리지만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와중에 아들은 경매에 아파트가 넘어간다며 종두에게 보상금 받은 돈을 뜯어가고, 딸은 택시기사로 사고를 낸 남편의 합의금이 필요하다며 돈을 요구한다.
자식에게 돈을 갚으라고 큰소리를 치는 종두지만 결국 다 내주고 만다.
“동풍인지 서풍인지도 모르고 이리 쏠리고 저리 몰리고, 이놈 손에 찢기고, 저놈 발에 밟히는 풀잎이었지. 검은 옷 입은 낯선 사람 들어서면 쥐 달음질로 들어와서 아이고, 얘야, 사람 잡으러 왔다. 숨어라. 눈만 흘겨도 좌익이고, 혓바닥 한 번 잘못 놀리면 반동이요, 옳은 소리 했다고 공산당, 공출 안 냈다고 툭탁, 기피자라고 잡아가고. 이쪽에서 끌어가고 저쪽에서 가두고 좌익이다. 저놈 잡아라, 호르르륵. 반동이다, 처단하라, 솔밭에서 장끼 날듯 쫒기는 산짐승들 아니던가. 잊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나 이제 와서 그런 말 하면 누가 믿어.”
종두, 오리, 황새는 동갑내기로 일제 강점기를 17년 살고, 해방되고 육이오까지 5년을 살고, 휴전까지 3년을 산다. 이 세월 속을 살아낸 사람들이다. 서로 죽이고, 죽이는 살얼음판 속에서도 이들은 공동체를 유지하며 마을을 지키고 서로의 목숨을 구하지만 공동체는 무너지고 만다.
뒤집고 밀어붙인 자리에는 산업단지가 아닌 아파트가 들어선다.
기초공사를 위해 땅을 파는데 아무리 땅을 파도 암반이 나오지 않아 그 자리에 못을 만들었다. 소귀신이라는 게 정말로 그 못속에 있는지, 환청인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소울음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1941년 전북 완주군 봉동읍 둔산리 529에서 출생했다. 중·고교 교사 및 주일 한국대사관 근무했으며, 2000년 국제신문 일억 원 고료 장편소설 공모에 『만월까지』로 당선되었다. 저서로 장편소설 『만월까지』 전 3권(실천문학사), 『유령의 자서전』(실천문학사), 산문집 『미처 못 다한 말』(북토피아), 『먼 십릿길』(수필과 비평) 등이 있다.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