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 유응부인가 김문기인가
‘사육신’이라는 명칭은 단종 복위운동(세조 2년, 1456년)에 목숨을 바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의 충절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추강 남효온(1454~1492년)이 쓴 『육신전』에서 비롯되었다. 세조 집권기 이후 오랫동안 금기로 인식되던 사육신의 절의에 대한 평가는 조선시대 정세의 기복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여 중종이 참석한 조강朝講에서 성삼문과 박팽년 등에게 난신亂臣이라는 죄명을 벗기고 충신으로 평정하기를 건의하기도 했으며, 연산군 때는 발간이 금지된 남효온의 시문집도 인출, 반포되었다.
사육신이라는 명칭이 성삼문, 하위지, 박팽년, 유응부, 이개, 유성원의 순으로 왕조실록에 처음 나타는 것은 『인종실록』에서이며, 숙종 때에는 사육신과 생육신을 모두 절의의 표본으로 삼아 국가에서 이를 표창해야 한다는 건의가 일어나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나아가 정조 때에 이르러서는 절의 숭상의 범위를 더 넓혀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모든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御定配食錄(임금의 명에 의해 공신의 신주를 배향하는 것)」을 편정하도록 했는데,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가 ‘사육신’이라는 명칭으로 편정되었고 김문기는 ‘삼중신’ 중 한 명으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1977년 국사편찬위원회와 어용학자들이 사육신 중 유응부를 김문기로 대체하려는 역사 날조극을 자행했고 1978년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 조성 당시 권세가(김문기의 후손인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작용으로 기존 사육신의 묘와 함께 김문기의 허묘와 위패를 추가로 봉안함으로써 사칠신 묘소가 된 이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95년 사육신 춘계제향에서 사육신 후손의 모임인 사육신선양회와 김문기 후손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2008년 5~6월에는 양측의 주장과 반박문이 모일간지의 광고지면에 게재되기도 했다.
이 책은 각종 실록을 꼼꼼히 고증해 유응부와 김문기 중 누가 진짜 사육신인지 밝혀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해 ‘사육신 오판’을 바로잡는 일이 명분과 역사를 바로세우는 중대한 과제임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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