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돈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간신 유외를 주살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남경을 점령했다. 원제의 곁에는 두 명의 종복만 남아 있었다. 원제는 말없이 군장을 풀고 조복으로 갈아입은 다음 왕돈을 향해 ‘진작 이 자리를 차지하려더니 빨리 차지했구려. 백성들은 괴롭히지 마시오’라고 말했다. 기백은 웅장했지만 이미 자신의 몸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왕돈은 곧장 근거지인 무창(武昌)으로 돌아갔다. 원제의 아들 사마소(司馬紹)가 뒤를 이었다. 그가 명제(明帝)이다. 왕도는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명제는 아버지에 비해 뛰어난 결단력과 모략을 지녔다. 사서는 명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문무를 겸비했으며, 현명한 사람과 빈객들을 아꼈고, 문장에도 능했다. 당시의 명신이었던 왕도, 유량(庾亮), 온교(溫嶠), 환이(桓彛), 원방(阮放) 등을 모두 가까이 대했다. 성인의 옳고 그름에 관한 논쟁을 할 때는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았다. 또 무예를 익히기를 좋아했으며, 장군들과 군사들을 잘 어루만져 주었다.”
이러한 인물이 황제가 되었으니 왕돈에게도 불리한 상황이 되었다. 왕돈은 명제가 불효했다고 무고하면서 폐위하고자 했지만, 대신들의 반대로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왕돈은 군사력과 인맥에서 유리했으므로 명제를 충분히 제압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머뭇거리는 사이에 그의 방자해진 심복들끼리 서로 핍박하며 살육하는 상황이 전개됐다. 더 이상 그에게 우세한 상황은 돌아오지 않았다. 힘에서 밀리던 명제는 우회전술을 채택했다. 그는 왕돈의 세력들이 내분을 일으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상대의 전력을 분산시켜서 적을 우군으로 만들기 위한 치밀한 계획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단양윤(丹陽尹) 온교는 원래 왕돈파가 조정에 심어 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명제의 사람이 되어 왕돈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규탄할 정도로 변했다. 왕도는 왕돈의 신임을 받았지만 지금은 명제에게로 기울어서 오히려 그의 형이 하는 짓을 책망하게 되었다. 왕돈의 세력이 분화되자 원래 왕돈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세력들이 명제에게로 몰려왔다. 왕돈도 그러한 명제를 좌시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일촉즉발의 상황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중략)
동한의 화제(和帝)가 즉위하자 환관들이 외척의 권력전횡을 막으려는 황제를 지지하며 세력을 키웠다. 환관의 대두는 화제 때부터 시작된 어린 황제의 등극 때문이었다. 어린 황제가 잇달아 일찍 죽자 황위계승이 불안해졌다. 태후가 섭정하자 외척이 권력을 장악했다. 동한의 외척들은 서한보다 능력은 떨어졌으나 권력의 전횡은 더 심했다. 장성한 황제는 그러한 외척들에게 불만을 품었다. 황제는 어려서 자신을 키운 환관을 신임했다. 외척의 권위는 황제와 태후의 사망으로 바뀌지만, 환관은 여전히 신임황제를 측근에서 모셨으므로 정치적 기반이 더 튼튼했다.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능가하는 외척들보다 절대로 황제가 될 수 없는 환관이 더 안전했으므로, 환관의 탐욕을 눈감아 주는 대신 충성심을 확보했다. 화제 이후 계속된 환관과 외척의 권력투쟁으로 국정이 문란했지만, 후한이 망하지 않은 것은 명절(名節)을 중시하며 소임을 다한 사대부들 덕분이었다. 그들은 관직에서 물러났어도 혼탁한 정치를 비평하는 ‘청의(淸議)’를 통해 건전한 기풍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일성.
JDA 뉴스 편집진.
작가 겸 언론인
어부지리(漁父之利)
진퇴양난(進退兩難)
고금취상(鼓琴取相)
미전선모(未戰先謀)
피실취허(避實取虛)
혹약재연(或躍在淵)
대장부론(大丈夫論)
가치부전(假癡不癲)
대지약우(大智若愚)
천적필생(天敵必生)
십상시론(十常侍論)
마정방종(摩頂放踵)
막역지교(莫逆之交)
불구문달(不求聞達)
대사면령
승천태후(承天太后)
인의난제(仁義難題)
어부지리(漁父之利)
이타주의(利他主義)
현실주의(現實主義)
중경담판(重京談判)
강권법칙(强勸法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