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스페인 극작가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대표작이다. 궁정 시인으로서 국왕의 비호하에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극의 완성도, 서정적이면서도 장중한 운문체 대사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스페인 황금세기 문학은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죽음과 함께 종말을 맞았다.
엔리케 8세는 카탈리나 왕비의 시녀로 입성한 아나 볼레나를 보고 첫눈에 반한다. 울지 추기경이 왕의 심경의 변화를 알아차린다. 울지 추기경은 이를 기회로 삼아 권세를 누리고자 한다. 평소 자신을 냉대하던 카탈리나 왕비를 내쫓고 아나 볼레나를 왕비 자리에 앉힐 계획을 착착 진행시켜 나간다. 드디어 왕이 카탈리나 왕비와의 이혼을 선포한다. 울지 추기경의 계획대로 아나 볼레나가 왕비에 등극하지만, 울지와 새 왕비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잉글랜드는 새로운 분열 국면을 맞는다.
<<잉글랜드의 분열>>은 셰익스피어의 <<헨리 8세>>와 마찬가지로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 사건을 다뤘다. 다만 셰익스피어가 엘리자베스 1세의 대관식으로 영국의 찬란한 미래를 예고하며 극을 마무리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후에 ‘피의 메리’라 불리게 될 메리 1세의 대관식으로 끝을 맺는다. 각각 자신이 속한 나라와의 이해관계에 부합한 결과다. 셰익스피어의 이성적이고 냉철한 헨리 8세와는 완전히 다른 헨리 8세를 만나 볼 수 있다. 칼데론 데 라 바르카의 3대 걸작으로 꼽인다.
페드로 칼데론 데 라 바르카(Pedro Caldero??n de la Barca)는 1600년 1월 17일 하급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귀족이었으며 펠리페 2세와 펠리페 3세의 재정고문관의 비서였다. 어머니는 플랑드르 귀족 출신의 후손이었다. 그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부유하지는 않았다. 1608년 마드리드의 예수회 제단 학교에 입학해 1613년까지 철학, 수학, 역사, 라틴어, 그리스어 등을 배웠고, 훗날 그의 작품에 깊이 각인될 예수회 정신을 체득한다. 1614년 알칼라 데 에나레스 대학에서 논리학과 수사학을 공부했으며, 1615년부터 살라망카 대학에서 법학과 철학, 지리, 정치 등을 공부하고 교회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때 공부한 것이 훗날 칼데론이 극작 활동을 하면서 작품 세계를 심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1610년 어머니가 사망하자 계모 후아나 프레일레(Juana Freyle)의 모진 구박을 견뎌야만 했는데, 1615년에는 아버지마저 사망했다. 어려서부터 문학과 연극에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로 무대에서 공연된 작품은 ≪사랑, 명예, 권력(Amor, honor y poder)≫으로, 1623년 6월 29일 마드리드에서 후안 아카시오 베르날(Juan Acasio Bernal) 극단에 의해 공연되었다. 군 복무 중이던 1625년 ≪위대한 세노비아(La gran Cenobia)≫가 공연되고 이어서 ≪브레다 포위≫, ≪시장 스스로가(El alcade de si mismo)≫, ≪선과 악에 대해 알기(Saber del mal y del bien)≫ 등이 공연되면서 극작가로서 칼데론의 명성은 높아졌다. 1630년 칼데론은 본격적으로 성공적인 극작가의 길을 걷게 되는데, 특히 ≪아폴로의 월계관(El laurel de Apolo)≫으로 로페 데 베가의 인정을 받게 된다. 이후 1650년까지 칼데론은 전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세속극을 많이 썼다. 이 시기에 쓰인 대표적인 작품들로 ≪요정 부인(La dama duende)≫, ≪문이 두 개인 집은 지키기 어려워(Casa con dos puertas, mala es de guardar)≫, ≪사랑을 조롱해서는 안 돼(No hay burlas con el amor)≫, ≪지조 깊은 왕자(El principe constante)≫, ≪경이로운 마법사(El magico prodigioso)≫, ≪자신의 명예를 고치는 의사(El medico de su honra)≫, ≪살라메아 시장(El alcalde de Zalamea)≫, ≪세 가지 불가사의(Los tres mayores prodigiosos)≫, ≪은밀한 모욕에는 은밀한 복수를(A secreto agravio, secreta venganza)≫ 등이 있으며, 칼데론의 가장 훌륭한 작품인 ≪인생은 꿈(La vida es sueno)≫도 1630년대에 쓰인다.
칼데론은 성찬신비극(El Auto Sacramental)이라는 종교극 분야에서도 두각을 나타내 ≪세상이라는 거대한 연극(El gran teatro del mundo)≫, ≪인생은 꿈≫(성찬신비극), ≪성스러운 오르페오(El divino Orfeo)≫ 등의 대표적인 성찬신비극을 썼다. 1640년대부터 칼데론의 극작 활동은 눈에 띄게 줄어든다. 1680년에는 마지막 희곡 ≪레오니도와 마르피사의 운명과 명찰(Hado y divisa de Leonido y Marfisa)≫을 쓴다. 궁정 기사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은 왕궁에서 먼저 상연된 뒤 대중을 위한 코랄에서의 공연이 21일이나 지속되는 등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작품을 썼다. 1681년 성체절을 위한 성찬신비극 ≪이사야의 양(El cordero de Isaias)≫을 쓰고, ≪신성한 필로테아(La divina Filotea)≫를 절반만 완성한 채, 유언을 써 놓은 지 닷새 만인 1681년 5월 25일 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