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명학은 중국 송나라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주자학)에 반기를 들고 명나라 때의 왕수인(양명)이 제기한 새로운 유학이다. 동양 삼국 중 중국과 일본에서는 양명학이 주자학의 대안으로 활발하게 연구되었고, 특히 일본의 경우 메이지유신의 주역들이 양명학의 훈도를 받은 사람들이어서 근대화의 담당 세력을 길러낼 정도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양명학 도입 시기의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숨어서 하는 학문’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고, 따라서 지금의 우리에게도 아직 생소한 편이다.
정인보는 1933년 양명학의 기본 개념과 창시자 왕수인의 생애, 중국 및 한국 양명학의 전개를 내용으로 하는 《양명학 연론(演論)》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이 글은 정인보가 6ㆍ25 때 납북된 뒤 출간된 그의 저작집 《담원국학산고(?園國學散藁)》에 실렸고, 1970년대에 삼성문화문고로 재출간되었다. 그러나 글이 옛날 한문투여서 요즘 사람들로서는 읽기가 불가능한 데다가, 《동아일보》 연재분부터가 정인보의 서술과 인용문의 구분이 제대로 돼 있지 않았는데 이런 부분이 삼성문화문고본에서 바로잡히지 않았고 새로이 오ㆍ탈자와 탈구(脫句)가 많이 생겨 더욱 알 수 없는 글이 돼버렸다. 지금도 학술 논문에서 삼성문화문고본을 주로 인용하는데, 그래서 왕수인의 글을 정인보의 글로 오해해 인용하고 오자까지 그대로 따오는 일도 일어나는 형편이다.
이 책에서는 정인보의 한문투 글을 현대어로 바꾸고, 잘못된 본문과 인용문의 구분을 전면적으로 바로잡았으며, 오ㆍ탈자와 탈구도 바로잡았다. 특히 ‘이옹(李?)’을 ‘이용(李容)’으로 적는 등 원저자의 착오로 보이는 부분이나 《동아일보》 연재분의 오ㆍ탈자도 최대한 바로잡았다.
정인보(鄭寅普, 1893~1950?)는 한학자이자 역사학자로, 호가 담원(?園)ㆍ위당(爲堂)이다. 어려서 강화학파의 학통을 이은 이건방(李建芳)의 제자로 학문의 기초를 쌓았으며, 21대 때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나 첫 번째 부인의 사망으로 귀국한 뒤 연희전문 교수로 재직하며 국학 연구와 언론 활동에 종사했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과 정약용(丁若鏞)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등을 교열해 간행하고, 우리 고서(古書
4. 양명학의 계승자들
5. 조선의 양명학파
에필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