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냉수 한 컵씩을 자시고 산보를 하십시오.'' 하는 의사의 말을 들은 나는 다음날부터 해란강변에 나가게 되었으며 그곳에 있는 우물에서 냉수 한 컵씩 먹는 것이 일과로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는 타월 비누갑 컵 등만 가지고 나갔으나 부인네들이 물 길러 오는 것이 하도 부럽게 생각되어서 어느덧 나도 조그만 물동이를 사서 이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번번이 우물가에는 부인으로 꼭 채여서 미처 자기 얻기가 대단히 힘듭니다. 아마도 이 우물의 물맛이 용정에서는 제일 가는 탓으로 부인들이 이렇게 모여드는 모양입니다. 내가 물동이를 이고 가지가 조롱조롱 맺힌 가지밭을 지날 때마다 혹은 그 앞에 이슬이 뚝뚝 듣는 수수밭 옆을 지날 때마다 꼭 만나는 여인이 있으니 언제나 우리 사이는 모른 체하고 가지런히 걸어서 우물까지 가곤 합니다. 모른 체하는 이가 하필 그뿐이며 어깨 위를 스치는 수숫잎 속에서 만나는 사람이 어찌 그이뿐이리오만은 어쩐지 그를 만날 때마다 ''또 만났구나! 또 모른 체하누나!''하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이렇게 지나가기를 월여나 지난 어느 날 아침 나는 여전히 가지밭까지 왔습니다. 흑진주알 같았던 가지에는 어느덧 검붉은 가을 물이 들었으며 수숫잎 역시 바람결에 우수수 하고 가을 소리를 합니다. 그때 신발소리가 자박자박 나므로 나는 그가 아닌가? 하고 휘끈 돌아보았을 때 아니나다를까 그였습니다. 그는 웬일인지 얼굴이 푸석푸석 부은 듯했으며 바른 볼에는 퍼렇게 피진 자국이 뚜렷하였습니다. 나는 선뜻 남편과 쌈을 했나 혹은 어디서 넘어졌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그와 가지런히 걸었습니다. 나는 어쩐지 오늘 아침은 그와 꼭 말을 건네고 싶었습니다.
저자 강경애 1907년 4월 20일 황해도 송화 출생. 5세 때인 191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 의붓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으며 이 시기에 겪었던 심리적?경제적 곤란은 그의 작품경향에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21년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동맹휴학에 가담한 관계로 1923년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 1923년 문학강연회를 계기로 양주동과 만나게 되어 이듬해 서울로 함께 올라왔으며 동덕여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했다 양주동과의 관계가 파탄에 이른 1924년 9월 귀향하여 야학운동 신간회 등 여러 사회운동에 투신하였다. 1931년경 간도를 여행하고 귀국한 후 작품을 창작하였으며 문단 등단작은 1931년 조선일보 ‘부인문예’란에 발표한 파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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