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기가 천국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죠.”
어느 날 갑자기 이상한 잿빛 복도 속에 떨어진 정민. 그녀 앞에는 냉철한 외모로 단단히 무장한 낯선 여자가 서 있다. 복도는 미로처럼 육각형의 모양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고, 복도마다 같은 모양의 하얀 문이 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마치 죽은 이들의 공간 같다. 살아있는 거라곤 자신과 자기 앞에 서 있는 여자뿐인 거 같다. 아니, 어쩌면 자신도 살아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고, 정민은 생각한다.
여자는 정민에게 긴 숫자가 적힌 카드키 하나만 건네주고 사라진다. 정민은 어떻게든 그 숫자가 적힌 방으로 찾아가보기로 한다. 이곳이 어디며,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방 안에 해답이 들어있으리라 기대하면서 복잡한 미로 속을 걷기 시작한다.
○ 나는 대학에서 2년 동안 열심히 공부한 끝에, 할 일 없는 사람이 되어 배출되었다. 배설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이 살아가는 정민은 대한민국 청년백수 중 한명. 지구는 자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자신을 괴롭혀온 곳이라 생각하며 늘 현실도피만을 꿈꾼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은 껌종이 버리듯 바닥에 질질 흘리고 다닌다.
학창시절, 정민은 좋아하는 걸 어른들로부터 뺏긴 후 어떤 일에도 흥미를 보이지 못한다. 원하지도 않는 대학에 입학해서 아무 생각 없이 남들이 하는 건 다 따라했고, 정작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언지도 모른 채 졸업을 한다. 졸업을 하니 역시나 하고 싶은 일도 없고, 할 일도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 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메이크업 학원에 등록을 한다. 그때까지 정민은 자기 얼굴에 화장 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다 연예인을 꿈꾸는 진아를 사귀게 된다. 야무지고 당찬 진아의 꿈 앞에서 정민은 아무 생각 없이 학원을 왔다 갔다 하는 자신이 한심해진다. 그러나 한심한 자신에서 벗어날 방법을 알지 못한다. 역시나 한심하게, 자신이 학원에서 사기를 당한 것을 알게 된다.
● 육각형의 관(棺)처럼 생긴 방들이 정교하게 맞물려 끝도 없이 늘어서있다.
그건 마치, 거대한 벌집 같았다.
끝도 없이 펼쳐진 육각형의 방들 사이로 육각형의 복도가 흐른다. 그 복도 때문에 각각의 방은 옆방과 맞닿은 곳이 없어, 마치 육각형의 복도 위에 홀로 떠있는 섬 같다. 사람들은 이곳을 벌집이라고 불렀다. 정민은 이곳에서 안식을 느끼며 정착해간다. 벌집은 인간이 살기에 최적화된 곳으로 좌절과 두려움 같은 불행한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각자의 방에는 꿈 생성기가 있다. 이것은 인간의 불안한 마음을 거둬내고 평온한 꿈만 주입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기계다. 사람들은 자신의 방에서 꿈 생성기가 만들어주는 꿈을 꾸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며 지낸다. 딱히 해야 할 일도 없고, 밖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정민은 희명이라는 여자와 언행이 이상한 아저씨를 알게 된다. 정민은 유일하게 희명에게만 마음을 열고 지낸다. 아저씨는 정민과 희명이 함께 있을 때마다 나타나 자꾸만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희명은 미친 아저씨라며 무시해버린다. 그러나 정민은 왠지 아저씨의 이상한 이야기가 마냥 이상하게만은 들리지 않는다.
어느 날 정민은 충격적인 사건을 접한다. 아저씨는 그 사건을 가지고 더욱 이상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이곳은 어딜까, 불행이 없다는 이곳에서 나는 정말 불행하지 않게 지내고 있는가. 잠시 잊고 있던 의심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들고 일어난다. 정민은 자꾸만 불안한 꿈을 꾸며 혼란스러워한다.
○ 카드빚은 잔인하게 불어나고 있었다. 난 또다시 할일 없는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무언가라도 해보려고 시작한 메이크업 수업은 결국 빚만 남긴 채 끝났다. 정민은 또 다시 할 일 없는 사람이 되었다. 이번에는 진아도 함께였다. 그러나 꿈에 대한 진아의 열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정민이 세상을 다 잃은 것처럼 낙담하고 있는 사이 진아는 자신의 꿈을 이룰 다른 방법에 대해 생각한다. 그리고 정민을 데리고 댄스 학원에 등록한다. 그 학원에서 실력이 뛰어난 학생들을 방송계로 진출시킨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정민은 할 일이 없다는 무력감과 마주할 자신이 없어 진아를 따라 학원을 다닌다. 그러나 역시 학원을 다녀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정민은 학원에서 한 남자를 만난다. 가난하지만 꿈만은 누구보다 원대한 남자. 그와 정민, 그리고 진아는 늘 함께 다니며 서로를 위로하고 보듬어준다. 그러나 녹록치 않은 현실 앞에서 셋이 당당하기엔 어쩐지 역부족이다. 아니, 그건 정민 혼자만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 “이게 바로 정민씨가 궁금해 하던 벌집의 진실이에요.”
유리벽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빽빽하게 누워있었다. 마치 죽은 것처럼.
계속 불안몽을 꾸던 정민은 진료소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의사의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놀란다. 정민은 의사에게 벌집의 진실에 대해 따져 묻고, 의사는 대답 대신 그녀를 어떤 방으로 데려간다. 그 방에서 정민은 수족관처럼 생긴 유리벽 안에 빼곡하게 누워있는 사람들을 목격한다. 그들의 모습은 남녀노소 가지각색이지만 죽은 듯 싸늘한 표정만은 일률적이다. 정민은 겁에 질려 도망치려 하지만 의사는 냉철한 눈빛으로 정민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리고 마침내 벌집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한다. 하지만 의사의 이야기 속에는 빛을 보지 못하고 숨어있는 진짜 진실이 있음을 감지한다.
정민은 혼란스러운 마음을 달래고자 희명을 찾아가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진짜 이야기를 고해하듯 털어놓는다. 갈피를 못 잡던 정민, 문득 의사가 숨기려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다. 숨겨진 진짜 진실, 그것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정민의 등을 떠민다.
○ 그래서 그는 지금 행복할까.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만족감이, 컵라면 하나 사먹는 것도 편치 않은 현실을 충족시켜 주고 있는 걸까.
진아는 학원비를 마련하지 못해 학원을 그만두게 된다. ‘나 내 꿈 안 버려’ 이 한 마디만 남기고 떠나는 진아를, 정민은 차마 붙잡지 못한다. 진아가 떠난 날, 그는 수업 중에 넘어져 다리를 다친다. 인대가 파열돼서 당분간 움직이지도 못할뿐더러 춤추는 것도 힘들다고 한다. 그가 품어왔던 꿈이 그에게서 도망가려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정민과 그는 학원을 그만 두고 그의 자취방을 아지트로 삼아 둥지를 튼다. 한 사람 누우면 꽉 차는 그의 방에서 둘은 취업을 하기로 결심하지만 좀처럼 쉽지가 않다. 그들은 현실적 문제 앞에서 점점 치쳐가는 걸 느낀다. 그 무렵 둘 사이의 사랑과 낭만은 구멍 난 주머니 속에 담긴 모래처럼 슬금슬금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겨우리만치 되풀이되는 좌절과 절망 속에서 정민은 지금의 현실을 잊을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