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대다수를 죽게 만든 바이러스, 그후 50년. 법으로 누구의 접근도 허하지 않는 요새 같은 저택에 사는 준혁과 유나에게 낯선 방문객이 찾아온다. 그네들은 혈액제공자인 준혁과 유나를 보호한다고 말하지만 보호받는 입장에서는 사육당한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암묵적으로 거래가 성사된 후 방문객과 준혁, 유나는 서로 다른 꿈을 꾼다. 방문객이 단꿈에 젖어 있는 동안 준혁과 유나는 피를 마시는 자들의 종말을 지켜보기 위해, 그리고 설혹 자신들의 세대에서 종말의 시기가 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괴물들은 입이 까다롭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했다. 아무거나 먹지는 않았지만 미식가도 아니었다. 때문에 준혁과 유나는 무던히도 놈들을 속이려 시도했다. 물을 타 묽게 만들기도 했고 수상쩍은 분말을 섞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방치해서 신선도를 떨어뜨리기도 했다. 그러면 괴물들은 신기하게도 단번에 알아차렸다.
집은 온통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시각 준혁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틀어놓고 졸던 참이었다. 골동품 영화 속 묘한 눈빛을 가진 배우들이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준혁의 꿈속에선 더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는 떨리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 부엌 쪽에서 유나의 외마디 비명이 들렸다.
비명소리가 거실 소파에 누운 그를 흔들어 깨웠다. 나쁜 꿈이었다. 준혁은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유나!”
놈들은 금요일 밤만 되면 피를 요구했다.
불가해한 두려움이 그에게 스며들었다. 주름진 머릿속을 기어 다니는 다족류의 이미지. 유나는 실신하기 직전이었고 그 전에 그가 먼저 미쳐버릴 것 같았다.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왔다.
그때 유나가 눈을 번쩍 떴다.
눈물로 가득한 눈, 보고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원통함이 뚝뚝 흘러내리는 눈이었다. 짜릿한 진동이 온몸을 전율시켰다. 그는 완벽하게 괴물이 된 자신을 느끼며 바닥에 널브러진 남자를 향해 걸어갔다.
침대 아래에 칼이 떨어져 있었다. 허리를 숙여 그 칼을 잡았다. 날이 제대로 서 있는 칼.
원래는 이곳도 마을이었다.
소년은 마을이 사라지던 날 처음으로 그 사실을 알았다.
골렘 두 마리는 음흉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놈들의 눈에서 하얀 플래시가 터졌다.
소년은 자기가 비명을 지르게 되리란 걸 직감했다. 하지만 비명이 혓바닥 아래까지 치밀어 오른 순간 등 뒤에서 튀어나온 손이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비명을 되삼키도록 꾹꾹 밀어 넣었다.
그는 시키는 대로 했다.
제 5회 디지털 작가상 우수상 수상.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4 <도축장에서 일하는 남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