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흥섭은 1906년 9월 9일 충남 논산군 채운면 양촌리에서 태어났다. 출생지는 충남 논산이지만, 엄흥섭에게 실질적인 고향은 경남 진주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진주를 떠나 논산으로 옮겨 온 것은 아버지의 사업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업이 실패하며 가세가 기울고 아버지의 죽음을 시작으로 어머니와 큰형이 차례로 죽은 후 엄흥섭은 작은형과 함께 다시 진주로 내려가 살게 된다. 진주로 돌아가 숙부의 슬하에서 성장하게 된 엄흥섭은 소학교를 다니면서 ≪아라비안나이트≫, ≪로빈슨 크루소≫, ≪이솝 이야기≫ 등을 탐독하며 문학적 소양을 키워나간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 경남도립사범학교(진주사범학교의 전신)에 진학한 엄흥섭은 하이네, 바이런, 괴테 등의 시집을 읽으며 문학에 대한 동경을 키우는 한편 <학우문예>라는 동인지를 만들기도 한다. 또한 1923년에는 <동아일보>에 시 한 편을 투고해 게재되기도 한다. 1926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공립학교인 경남 평거보통학교에 ‘훈도’로 취직한다. 이 시기 농촌에서의 교원 생활은 훗날 농촌의 궁핍한 현실을 다룬 소설과 교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련의 지식인 소설을 창작하는 밑거름이 된다. 1923년 <동아일보>에 시가 게재된 이후 엄흥섭은 <동아일보>에 <꿈속에서>(1925. 9. 12), <성묘>(1925. 9. 24), <바다>(1925. 10. 12) 등을 연이어 발표하는 한편 1925년 <조선문단> 11호에 시 <엄마 제삿날>이 ‘당선소곡’으로, <조선문단> 12호에 <나의 시>가 ‘시 당선작’으로 게재된다. 이후 시 창작에 몰두하면서 지역의 문학청년들과 동인지를 만들며 문학 활동을 벌인다. 인천의 진우촌, 공주의 윤귀영 등과 함께 1927년 인천에서 <습작시대>를, 1928년에 공주에서 <백웅>을, 1929년에 진주에서 <신시단> 등의 동인지를 펴내며 지역 문예지의 활성화를 꾀했다. 지역 문학청년들과 교류하던 엄흥섭은 1930년 1월 단편소설 <흘러간 마을>을 <조선지광>에 발표하면서 일약 문단의 주목을 받는 소설가가 된다. 이후 교사직을 버리고 서울로 옮겨 와 잡지 <여성지우>의 편집 업무를 맡아보는 한편 송영, 박세영 등과 더불어 어린이잡지 <별나라>의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소설가의 길을 예비한다. 카프에는 1929년에 가입했는데, 1930년 4월에는 안막, 권환, 송영, 안석주와 함께 카프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카프의 맹원이 된 엄흥섭은 1931년 3월에 김병호, 양창준, 이석봉 등과 함께 ≪불별≫이라는 프롤레타리아 동요집을 펴내고 <별나라>, <신소년> 등을 통해 소년소녀들의 계급의식을 고취하는 동화 작품들을 창작하는 등 아동문학계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그러다 엄흥섭은 1931년에 발생한 이른바 ‘<군기> 사건’에 연루되어 카프에서 제명당한다. 카프 제명 이후에도 엄흥섭은 카프 이념에 동조하는 작품들을 창작하며 소위 ‘동반자 작가’로서 꾸준한 창작 활동을 펼친다. <온정주의자>(1932), <숭어>(1935), <안개 속의 춘삼이>(1934), <번견 탈출기>(1935), <과세>(1936), <정열기>(1936), <아버지 소식>(1937) 등이 모두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들이다. 1936년에 개성에서 발행하는 <고려시보>의 편집을 담당하고, 1937년에는 인천에서 발행된 <월미>에 참여하기도 한다. 1938년에 소설 <파경>이 유산계급을 매도하고 좌경 사상을 고취했다고 해 출판 금지되고, 기소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는 일을 겪는다. 일제 말기에 엄흥섭은 ≪인생 사막≫, ≪봉화≫, ≪행복≫ 등 통속적인 장편소설들을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간다. 1940년 5월 엄흥섭은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편집기자로 입사하고, <매일신보>에 <농촌과 문화>, <시련과 비약> 등 몇 편의 친일 성향의 작품과 평문을 발표하기도 한다. 해방 후 엄흥섭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거쳐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및 소설부 부원으로 참여하는 한편 인천의 <인천신문>의 초대 편집국장, 서울의 <제일신문> 편집국장 등으로 재직하며 언론계에서 주요 인사로 활동한다. 그러나 1948년 9월 <제일신문>에 북조선 인민공화국 창건 소식을 보도해 실형을 언도받는 필화 사건을 겪는다. 이후 1951년 월북해 북한작가동맹 평양지부장과 중앙위원을 지낸다. <다시 넘는 고개>(1953), <복숭아나무>(1957) 등 단편소설을 발표하고, 장편소설 ≪동틀 무렵≫으로 주목을 받는다. 1963년 한설야가 숙청될 당시 그의 추종 세력으로 몰려 뚜렷한 활동을 못하게 된다. 이후 북한에서의 행적은 알려진 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