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11월 15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필승(必承). 「금수회의록」과 「공진회」의 저자 안국선(安國善)의 외아들로 잘 알려진 그는 수송보통학교를 수료하고 1924년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휘문고보에는 소설가 김유정이 수학하고 있었다. 1926년 7월 8일 부친 안국선이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집안 사정 등으로 인해, 다음 해 12월 학교를 중퇴했다. 학업을 중단한 이후 개벽사에 입사하여 잡지가 폐간될 때까지 근무한다. 이후 "개벽"의 계열사 잡지 "제일선(第一線)" "신여성(新女性)" 등에 잠깐 관여하기도 했으나, "제일선"이 폐간되는 35년 3월을 전후하여 그만둔다. 그 뒤 상사회사(商事會社)에서 잠시 직장 생활을 하다가 거주지를 충청남도 전의(全義)로 옮겨간다. 서울과 전의를 오가며 활동하던 중, 만주사변과 2차 세계대전이 전개되자 한동안 충청도에 머무른다. 1944년 9월 26일 충남 연기군 농민 133명과 함께 일본 기타규슈 탄광으로 징용돼 끌려갔다가, 일 년 후인 1945년 9월 26일에 귀국한다. 해방이 되자 그는 ‘조선문학건설본부’에 가입한다. 특히 1945년 12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 합쳐져 ‘조선문학가동맹’을 결성할 때, 소설부 위원장 겸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한다. 1946년부터 미군정이 남로당 계열의 문인들을 색출·검거하기 시작하자, 평소 친분 관계를 유지하던 임화, 이원조 등의 ‘조선문학가동맹’ 맹원들과 함께 1948년 월북한다. 월북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가 없으나, 「한국문학사」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 사이에 임화 등과 함께 숙청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