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징뤄의 <가정은원기>는 작게는 루징뤄와 그의 친구들이 가졌던 연극의 꿈을 대표하고, 크게는 중국 초창기 화극이 해낼 수 있었던 극예술의 최고 수준을 대변한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젊은 연극인들과 신극동지회를 결성한 루징뤄는 ‘춘류극장’을 창설해 전통극에서 벗어난 서양식 연극을 꾸준히 선보였다. 그중에서도 창작극 <가정은원기>는 대중의 호응을 얻는 데 성공해 이들의 대표작이 되었다.
저자 : 루징뤄
저자 루징뤄(陸鏡若, 1885∼1915)는 중국 최초의 화극 <흑인 노예의 절규>(1907)에 참여하며 화극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후지사와 아사지로의 배우 양성소에 다니며 본격적으로 연극 공부를 시작했다. 특히 일본 신파극 중에서도 예술지상주의 경향이 강했던 이이요호(伊井蓉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자신처럼 연극을 좋아하는 어우양위첸 등 친구들과 춘류사 내에 연극 소모임 신유회를 만들어 <명불평>(1908), <열혈>(1909) 등을 공연했다. 그리고 1910년, 그는 배우 양성소를 나와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遙)의 연극 연구소로 가서 연극 공부를 계속했다. 연극 공부와 동시에 이 무렵부터 그는 여름방학이면 귀국해서 공연을 하기 시작했다. 1910년 6월, 그는 상하이 문예신극장(文藝新劇場)에서 <노예(奴隸)>, <애해파(愛海波)>, <맹회두(猛回頭)> 등을 3주에 걸쳐 공연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11년 여름에는 <열혈>과 사토 코우로쿠의 <구름의 울림(雲之響)>을 개역한 <사회종>을 황난난(黃??) 등과 공연했다. 1912년, 춘류사 시절 친구들이 귀국하자 그는 유학 시절의 옛 친구들과 국내에서 함께 공연하던 루루사(陸露沙) 등 새 친구들을 모아 신극동지회(新劇同志會)를 만든다. 신극동지회는 장쑤 성과 저장(浙江) 성 등 창장 하류 유역에 있는 여러 도시들을 순회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다가 1914년 4월, 머우더리(謀得利) 소극장을 상설 공연장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춘류극장(春柳劇場)이라는 새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관객에게 외면당한 직업 극단의 형편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사재를 털어 극단 붕괴를 막았고, 번역과 창작, 연출, 연기 등 극단의 거의 모든 일을 감당했다. 극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은 초인적인 것이었지만, 몸은 초인이 아닌 사람이었다. 너무 많은 책임을 혼자 떠맡았던 그는 결국 서른 살 젊은 나이에 병사했다.
역자 : 김종진
역자 김종진은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영동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중국 근현대 연극을 전공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중국 근대 연극 발생사≫(연극과인간)가 있고, 대표 논문으로는 <중국 화극의 중국성(中國性)과 중국적인 화극>, <중국의 화극 민족화와 민족 화극> 등이 있다.
나오는 사람들···················3
제1막······················5
제2막······················41
제3막······················59
제4막······················77
제5막······················89
제6막······················98
제7막·····················110
해설······················118
지은이에 대해··················128
옮긴이에 대해··················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