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일전쟁 취재를 위해 한국에 왔던 영국 언론인 배설(裴說:Bethell, Ernest Thomas) 그는 왜 『대한매일신보』라는 항일 신문을 발행했을까? 한말 최대의 민족지 『대한매일신보』 사장 배설은 1883년 한영수호조약이 체결된 이후 한국인들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겨준 언론인이다. 16살 어린 나이에 영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와서 15년 동안 고베神戶에서 무역업에 종사한 후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에 들어와 신문을 발행하면서 약소국 대한제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진 의혈 청년이었다. 숨을 거두면서 그가 마지막 남긴 유언은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 민족을 구하라”였다. 배설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던 위급한 정세 아래에서 국한문·순한글·영어 세 개의 신문을 발행하였다. 자신의 신문사를 항일운동의 구심점으로 만들고 영국인이 갖는 치외법권을 방패막이 삼아 일본 경찰의 검열을 피하면서 민족진영의 목소리를 대변했으며 한국의 억울한 입장을 외국에 알렸다. 대한매일신보사는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의 본거지였고, 국채보상운동 의연금총합소가 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각지에서 일어나는 항일 의병들의 활동을 보도하고 격려하였다. 한국인들은 배설의 신문을 열광적으로 지지하였다. 배설이 신문을 발행하던 시기에 나라의 운명은 이미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1894)과 러일전쟁(1904)을 치르면서 한반도에서 중국과 러시아 세력을 몰아내고 침략의 발판을 굳히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다는 방침을 확립한 상태였다. 이 같은 국제정세의 흐름을 잘 알고 있었을 배설이 기울어지는 약소국 대한제국의 편에 서서 싸웠다는 사실은 불가사의하면서도 감동적이다. 저자는 배설이라는 인물과 그가 발행한 신문에 오래 전부터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초반부터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과 한글판을 조사하여 영인본을 직접 제작하였다. 한국·영국·일본의 각종 비밀자료와 외교문서를 발굴하면서 배설을 연구하였다. 배설의 성장배경, 학력, 한국에 오기 전까지 일본에서의 생활을 밝히고, 한국에서의 언론활동과 그에 따르는 재판을 살펴보았다. 배설과 그의 신문은 항일 의병투쟁, 국채보상운동, 애국계몽운동, 항일비밀결사신민회 등과 깊은 관련이 있으며, 고종이 영국 일간지 『트리뷴』 기자에게 보낸 밀서사건에도 배설은 깊이 간여하였다. 항일 민족운동사의 중심에 『대한매일신보』와 그 발행인 배설이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저자는 40년간 연구를 통해 망국 역사의 한 가운데서 싸운 인물 배설과 그가 발행한 신문, 나랏일을 근심하고 염려하는 언론인들의 활동을 글로 써서 100년 전의 여망을 구현하겠다는 속깊은 애정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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