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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항일여성운동계의 대모 김마리아

전병무 | 역사공간
  • 등록일2016-02-10
  • 파일포맷pdf
  • 파일크기1 K  
  • 지원기기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태블릿,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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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김마리아는 반평생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해방을 1년 앞두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 그녀는 항일독립운동과 여성운동의 횃불이자 샛별과 같은 존재로, 그녀의 독립정신은 동정녀로서 조국의 독립과 결혼할 만큼 순수했고, 그의 항일투쟁은 전장에서 항상 선봉에 섰던 잔다르크처럼 용맹하였다. 1919년 3월 6일 김마리아는 3?1운동에 참여한 주동자로서 정신여학교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형사들은 일본에서 귀국할 때, 동경유학생들로부터 독립운동에 관해서 부탁받은 사항에 대해 집중적으로 추궁했고 일제로부터 심한 고문에 시달려야만 했다. 여러 고문 중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은 대나무 봉으로 머리를 때리는 것이었다. 똑같은 간격으로 기술적으로 피가 나지 않게 계속 집중적으로 머리를 계속 때렸고 이로 인한 후유증으로 코와 귀에 고름이 잡히는 메스토이병에 걸려 평생을 심한 두통과 신경쇠약증 등으로 고생했다. 고문으로 생긴 고질병 축농증과 중이염이 크게 악화되어 1935년 원산 구세병원에서 수술받을 정도로 병고에 시달렸다. 1941년 여전도회전국연합대회에서 신사참배 반대를 선언한 김마리아는 일제의 감시와 압박을 더욱 심하게 받아야 했다. 여자신학원 학생들도 모두 신사참배에 불응했던 까닭에 일제는 이 학교에 대해 갖가지 방법으로 탄압을 가했다. 일제는 황국신민화정책에 순응하지 않는 학교를 강제 폐교시키거나 스스로 폐교하도록 하였다. 마르타윌슨 여자신학원도 결국 1943년 폐교 당했다. 같은 해 12월 7일 김마리아는 혈압으로 쓰러졌고 12시간 만에 깨어났으나 혼미한 상태는 계속되었다. 한 달 정도 지난 뒤 의식이 회복되었으나 별 차도가 없자 주위에서 입원을 종용하여 평양 기독병원에 입원하였다. 일제의 갖은 고문과 긴 망명생활로 약해질 대로 약해진 김마리아는 1944년 3월 13일 새벽에 영원한 조국을 가슴에 안은 채 영면에 들었다. 그로부터 1년 5개월 뒤 평생을 두고 그렇게도 소원하던 조국 광복이 찾아왔다. 이 책을 통해 근대 전환기와 식민 지배를 겪어야만 했던 한국의 한 여성으로서의 김마리아를 만날 수 있다. 여성으로서 차마 형언할 수 없는 일제의 잔혹한 고문을 당한 일과 미국 유학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여성운동을 이끌던 모습, 혈혈단신 중년의 여성으로 병마와 싸우며 지조를 지켜나가는 모습에서 그녀의 뜨거운 나라사랑이 가슴 시리게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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