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의 상해의거는 당시 군사력이 없던 상황에서 자주독립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윤봉길은 일제강점하 짧은 생애를 치열하게 살았다. 고향인 덕산에서 농민의 무지를 계몽하여 독립의 기초를 만들려는 농촌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일제의 폭압통치하에서 민족의 자유가 농촌의 부흥보다 절대적으로 우선한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으로 파급되었으나 철저히 유린되는 식민지국의 비참한 현실을 자각하였던 것이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란 유언을 남기고 부인 배씨에게‘물 좀 한 그릇 주오’라는 말로 가족과 이별하고 상해를 향해 집을 나섰다. 백범 김구를 만난 그는 ‘마음의 폭탄’을 가슴 속에 지니고 상해로 왔다면서, 이봉창의사와 같은 임무를 맡겨줄 것을 요청한 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왜적을 처단할 것을 맹서하였다. 마침내 윤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일본군 전승기념식에서 시라카와 대장과 일본군 제9사단장 우에다를 비롯하여 상해점령의 승리를 외치던 침략의 원흉들에게 폭탄을 던져 응징했다. 상해의거 후 윤봉길은 모진 고문을 받았으며 1932년 12월 19일 아침에 가나자와의 제9사단 영내인 작업장 한 기슭에서 총살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지 않고 육군묘지 아래의 길 위에 암장되었다가 1946년 3월 6일 발굴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유해가 암장되어 있던 가나자와의 암장지에는 박인조를 비롯한 재일동포들과 일본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그가 순국한 지 60주년이 되는 1992년 암장지적비가 건립되어 그의 영혼을 위로하고 숭고한 뜻을 기리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60년에 걸친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상해의거 만큼 큰 성과를 거둔 독립운동을 찾기가 쉽지 않다. 우선 상해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를 비롯한 수뇌부에게 철퇴를 가하는 큰 전과를 수립한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승식장에 도열한 일본 수뇌들이 폭살됨으로 일제는 상해의거로 인해 만주사변 이후 상해사변까지의 승리가 무색하게 되고 국제적 위신까지 꺾이게 되었다. 장개석 총통이 말한 대로 중국군 대군이 해내지 못한 일을 윤봉길 혼자 해냈으니 엄청난 전과를 수립한 것이다. 윤봉길은 자신의 길에 대해 조금도 의심이 없었다. 자신의 행위가 정의를 밝히는 길이며, 민족의 지상명령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집을 떠날 때 이미 살아서 돌아가지 않겠다고 각오하고 죽음으로써 망명한 뜻을 실천하였다. 윤의사의 고귀한 피는 역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찬양되어야 하며 우리는 정의의 역사를 길이 계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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