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에서 민족혁명당으로 다시 조선의용대로, 전투적 독립운동의 최선봉에 섰던 인물 빼어난 혁명이론가, 항일전선 최선봉의 지휘전사, 신념과 실천의 합일로써 의열정신을 구현해낸 민족운동가 “우리의 제1차 계획은 불행히도 파괴되고 무수한 동지들이 체포되어 처벌되었지만 체포되지 않은 우리 동지들은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 왜적을 섬멸하고 우리의 최후 목적을 도달할 날이 있을 것이다.” 2011년, 천안 독립기념관에 석정 윤세주 어록비가 세워졌다. 당당무비의 웅변으로 분출되던 정의의 기백과 불굴의 투혼이 꼭 90년 만에 그대로 되살아나는 듯 했다. 윤세주는 10대 소싯적부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최후의 결전’을 향해 줄기차게 나아가듯 항일독립투쟁의 길을 걸어갔다. 1920년대 이래로 독립운동 진영의 숙원이던 유일당적 대동단결체로서 민족혁명당을 탄생시킨 산파였고, 그 연장선에서 탁월한 조직가에 능란한 조정자 역할까지 책임지고 수행하였다. 넓게 열린 시야와 치밀한 논리로 뒷받침된 글들을 명징한 필치로 당내 최고의 이론가이자 신뢰받는 선전책임자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의열단 운동사 17년의 시작과 끝을 약산 김원봉과 함께 열고 닫은 역전의 용장으로서 그 감투정신의 화신이었다. 선후 연결된 운동행로 속에서 그는 의열단, 민족혁명당, 조선의용대가 각각 설립·운영했던 간부훈련기관에서 적어도 200명 이상의 한인청년들을 정예의 항일투사로 길러내고 민족간부로 성장시킨 일급 조련사요, 존경받는 스승이기도 했다. 중국 망명 전의 윤세주는 국내 여건에서 가능한 모든 방략과 수단을 취하고 동원하여 일제 식민지통치에 저항하고 맞서 싸워간 불굴의 투쟁가요 지혜로운 전략가였다. 스무 살에 독립만세 시위를 기획하고 주도했으며, 법정과 감옥에서도 저항과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감옥을 나와서는 합법공간을 최대로 활용하여 청년운동과 신간회운동의 진전과 성공을 위해 전심전력 헌신함과 아울러 항일언론투쟁도 과감히 전개하였다. 불의한 권력에 언제 어디서건 대항하는 드높은 기개를 보여주었다. 석정 윤세주의 일평생 걸음걸음은 독립운동의 수다한 노선과 영역들에 두루두루 미치고 걸쳐있었다. 열거해보면 비밀결사운동, 만세시위운동, 의열투쟁, 사회운동, 언론투쟁을 거쳐, 민족전선통일운동, 혁명당조직운동, 민족간부양성운동, 민중조직구축운동, 군사운동과 무장투쟁, 그리고 반제국주의 국제연대에 이르기까지, 진정 폭넓고도 광활하였다. 그렇게 그의 삶과 땀은 근대인적 자유와 민족해방과 조국독립 쟁취의 가시밭길에 그대로 다 바쳐졌고, 어느새 걸출한 민족운동가, 빼어난 혁명이론가, 항일전선 최선봉의 지휘전사로 우뚝 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 전체 행로를 한 구절로 요약한다면, 신념과 실천의 합일로써 의열정신을 구현해낸 민족혁명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윤세주가 굳건히 걸어간 독립운동 행로와 그 공적을 사실 그대로 구명하며 전체적으로 재조명하고 그 역사적 의미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제대로 된 평가, 나아가 그의 개성적 풍모 속의 인품과 정신을 자세히 알아보고 되새겨봄으로써 큰 울림을 주는 교훈을 여럿 얻게 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이 책은 최대한의 사실 복원과 설득력 있는 재구성에 목표를 두고 시간순차에 따라 생애사적 접근을 기본으로 하였으며, 세부 사실과 부분적 일화들을 거시적 맥락과 전체적 흐름에 조응시켜 배치하고 해석하였다. 회상록 혹은 소설풍의 장치도 약간씩 도입하였고 때로는 전후연관의 최대한의 복원을 위해 이유있는 상상도 마다하지 않은 해설과 평언이 섞여져 있다. 사실 나열의 밋밋하고 건조한 일대기보다, 윤세주의 삶과 존재 자체에 밀착하듯 다가가서 그 내면도 들여다볼 수 있는 통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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