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군무부장 통수부 막료와 판공처 주임 대한독립촉성 국민회 위원장 오로지 무너지는 나라를 지탱하려 버티고, 무너진 나라를 찾아 세우는 데 온 생애를 바쳤다 군사에 있어 훌륭한 장령將領일 뿐 아니라 강직하고 고결한 인격의 유소자로서 진실로 존경할 만한 애국 영수이었던 만큼 일반의 애도하는 정도 자못 높은 바인데……. -『자유신문』1948년 10월 9일 신문 기사는 조성환을 훌륭한 군사지도자이요. 강직하고 고결한 인격인이며, 그래서 존경할 만한 애국 지도자라고 평가하였다. 청사 조성환은 27세부터 1945년까지 무려 38년 동안 한 번도 곁눈질 하지 않은 채 오직 겨레를 위해 피와 땀을 쏟았다. 그는 무너진 나라를 위해 독립군을 길러내고, 한국광복군을 조직한 군사전문가로 구국투쟁을 위해 온 생애를 바친 독립운동가였다. 조성환은 대한제국 무관학교를 졸업한 장교출신으로 1907년 신민회에 발을 들인 뒤 애국계몽운동에 이바지하고 베이징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의 교두보를 확보한 뒤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전쟁에 기여하였다. 1930년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한 그는 1940년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국광복군을 창설했을 때 군사업무를 총괄하는 최고의 책임자인 군무부장을 맡았으며 통수부의 막료와 판공처 주임으로서 군정軍政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였다. 군사업무를 군령과 군정으로 나눈다면 조성환은 군정軍政을 총괄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국광복군이나 독립군에서는 대개 총사령관 이청천이나 2지대장 이범석을 우선으로 여기고 정작 군무부장이던 조성환에 대한 기록이나 연구는 많지 않았다. 이에 필자는 조성환의 삶의 자취를 찾고 뒤밟아 가면서 그의 생애를 복원하고 의미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필자는 조성환의 생애에서 독립운동의 행적으로 여섯 가지에 주목하였다. 첫째, 베이징을 독립운동의 주된 거점으로 만들었다. 그곳에서 신해혁명의 소식을 나라 안팎으로 알리고, 인재를 양성하면서 독립운동의 교두보를 구축하였다. 둘째, 무관학교 출신이라는 장점을 살려 독립군 양성과 독립군 조직 통합 작업에 매달렸다. 셋째, 1933년 이후 12년 동안 임시정부의 군사업무와 전시체제 구축에 힘을 집중하고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만주에서 활약하던 이청천의 한국독립군을 중국 관내로 이동시키는 작업을 하고, 군사특파단을 꾸려 전방으로 나아가 광복군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다시 임시정부 군무부장, 통수부 막료와 판공처 주임으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넷째, 그는 자리에 매달리지 않는 큰 배포를 지녔다. 좌우 통합정부를 구성하면서 선뜻 군무부장 자리를 내놓은 일은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다섯째, 고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이어가는 선상에서 한 걸음도 비켜나지 않았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위원장을 맡으면서 임시정부 대표라는 점을 내세웠다. 여섯째,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정신적 바탕으로 삼았다. 1920년대 북간도 지역에 대종교 근거지를 확보하고 이를 중심으로 한인동포사회를 경영하여 독립군 조직을 굳건히 버티도록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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