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적으로 박열은 항일운동가이며 아나키스트, 그리고 휴머니스트였다. 혁명가 박열, 그는 일본 황태자 암살계획으로 22년 2개월 동안 옥중에서 시간을 보낸 항일운동가다. 그의 삶은 격동의 20세기를 올곧게 살아 온 조선 청년의 참모습이었다. 박열의 생애에서 민족의식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순의 선생님의 말씀이었다. 일본의 압력에 못이겨 거짓교육을 했다는 선생님의 말씀은 박열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민족을 위해 헌신할 것과 후진을 양성할 것을 다짐하며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갔다. 그러나 경성고등보통학교에서 제도화된 일본제국주의 교육의 한계를 느꼈고 범사회주의적 생각을 갖기 시작했다. 그 후 3·1만세운동에 참가하면서 박열은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일본행을 결심했다. 박열은 도쿄에서 새로운 사조인 아나키즘을 만나면서 인간과 인간사이의 절대자유와 평등에 주목했다. 나아가 직접행동에 의한 일제 권력에 대한 대항을 생각했다. 사상운동의 한계를 일본 생활 속에서 확신하며 황태자 결혼식을 직접행동의 대상으로 선택하였다. 행동으로 옮기기 위한 폭탄을 준비하는 것은 그가 생각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운동과 삶이 하나였던 그에게 두려울 것은 없었다. 1923년 관동대지진은 조선인이 학살당한 사건으로 항일운동을 하던 박열에게도 보호검속이라는 일이 발생했다. 박열과 그의 아내 가네코 후미코는 연행당해 결국 재판을 받았다. 그는 대역 죄인이 되었으나 오히려 공판장에서 떳떳하게 기개를 갖고 임했다. 자신은 피고가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고 한복을 입었으며 일제의 왜곡된 재판을 근본적으로 부정했다. 사형선고와 무기징역이 그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못했다. 수형생활은 자신을 단련하는 기간이 되었고 오랫동안의 사색과 체력단련을 통해 그는 건강과 강인한 정신, 인간애를 감옥에서 체득했던 것이다. 판결 공판 때 사형이 선고되었을 때, 박열은 태연하게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하면서 법정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민족운동을 통해 아나키즘을 실현하며 옥중에서도 꿋꿋했던 그를 기억해야 한다. 그는 비록 많은 시간 옥중에 있었지만 항일의 중심에서 한 번도 멀어진 적이 없었다. 아나키스트로 시대를 격한 그의 사상은 오늘의 우리에게 시대를 보는 새로운 메시지를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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