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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부인전 (이광수 10)

이광수 | 유페이퍼
  • 등록일2017-02-16
  • 파일포맷pdf
  • 파일크기1 K  
  • 지원기기아이폰, 아이패드, 안드로이드, 태블릿, 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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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계몽적 논설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문명(文名)을 높이고, 이듬해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 신문학사상 획기적인 장편 〈무정〉을 연재하였다. 이어서 〈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을 탈고하고 ≪청춘≫에 발표하였다. 격심한 과로 끝에 폐환에 걸려 1917년 귀국, ≪매일신보≫ 특파원으로 남한 지역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떠났다.
1917년 두 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 폐환이 재발하였으나 허영숙(許英肅)의 헌신적 간호로 위기에서 소생하였다. 전통적인 부조 중심의 가족제도와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신생활론〉·〈자녀중심론〉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921년 4월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귀국, 선천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처분되자 이 때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 해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개벽≫에 〈소년에게〉를 게재한 것이 출판법 위반 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어서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민족진영에게 물의를 일으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이 무렵 ≪원각경 圓覺經≫을 탐독하면서 단편 〈할멈〉·〈가실 嘉實〉을 집필하였고, 김성수·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사의 객원이 되어 논설과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에는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선도자 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편완(中篇完, 111회)에서 중단되었다.
이 무렵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월하노사(月河老師)의 인도로 뒷날 ≪법화경 法華經≫에 심취하는 인연을 맺게 된다.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1923)이 물의를 일으켜 일시 퇴사하게 되었는데, 이 글은 이전에 물의를 일으켰던 〈민족개조론〉과 함께 나라 잃은 원인을 국민성 자체의 약점으로 돌리는 한편, 문화운동으로 전환할 것과 자치제에 대한 강력한 희망의 의지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동아일보≫에 〈허생전〉·〈재생〉(1924)·〈마의태자〉(1927)·〈단종애사〉(1928)·〈혁명가의 아내〉(1930)·〈이순신〉(1931)·〈흙〉(1932) 등을 연재하였다. 1940년 창씨개명 이후 이광수는 〈의무교육과 우리의 각오〉를 비롯한 많은 논설과 〈조선의 학도여〉 등의 시, 〈그들의 사랑〉 등의 소설, 〈성전 3주년〉 등의 수필을 썼다.
또한 〈반도민중의 애국운동〉 등의 평론, 〈자원병훈련소〉 등의 방문기 등 모든 문학 장르에서 일제를 찬양하는 글을 발표하였으며, 1943년부터 학병 권유의 글과 연설을 번갈아 발표하기도 하였다.
이광수의 문학관은 “동시대 최선의 세계관을 선택하고 동시대와 인물의 중심계급을 전형화하였다.”는 작자의 말을 참고하더라도 퇴폐적인 문학이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극단적 문학관을 지양하였다. 그는 〈무정〉을 ‘노일전쟁에 눈뜬 조선’, 〈개척자〉를 ‘한일합방으로부터 대전(大戰) 전까지의 조선’, 〈재생〉을 ‘만세운동 이후 1925년경의 조선’, 〈군상 群像〉을 ‘1930년대의 조선의 기록’이라고 스스로 말했다.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실주의문학을 지향하려 하였다. 이광수는 가운이 기울어짐에 따라 가난을 체험하면서 청일전쟁을 겪었고, 부모를 잃은 뒤 동학당 일을 본 탓으로 일본 헌병에 쫓겨 고향을 떠났을 때가 노일전쟁 중이었다. 그는 오산학교 교원 시절에는 경술국치의 망국인의 설움을 겪었고, 방랑 시절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들었으며, 그 종말을 사랑의 도피처인 북경에서 알았다.
3·1만세운동의 소식을 상해에서 들었는가 하면, 중일전쟁 발발시에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옥에 갇혔고, 광복 후에는 일제 말엽 훼절로 친일파라는 심판을 받고 수난을 당하였다. 6·25 중에는 젊은 시절부터 고생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생사불명, 거처불명의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는 민족근대사의 수난을 순교자처럼 받았고, 그것을 민감하게 소설·논설문·시가·수필류·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그의 원고매수는 8만매로 추량할 정도로 방대함.). 그의 직업은 교육자·언론인·민족운동가 등 다양하였으나 시종일관한 것은 작가이다. 흔히 이광수는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민족주의·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시대 분위기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대체로 이광수의 초기 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연애를 고취하고,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무정〉에서는 신교육문제를,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을,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계몽하였다.
그러나 이광수 연구자들은 그가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로 힘을 무산시켰다는 부정적 측면도 검토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인 면에서 그의 친일 행위는 변절한 지식인의 대명사로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저자소개

이광수[李光洙] 1892년 ~ 1950년, 호 춘원(春園), 장백산인(長白山人), 고주(孤舟), 외배, 올보리
시인·소설가·평론가·언론인.
저서(작품)는 사랑인가, 무정, 검둥이의 설움, 소년의 비애, 개척자, 허생전, 재생 등이 있다.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은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장백산인(長白山人)·고주(孤舟)·외배·올보리 등. 익명은 노아자·닷뫼·당백·경서학인(京西學人) 등이다. 평안북도 정주 출생. 아버지는 종원(鍾元)이며, 어머니는 충주김씨(忠州金氏)이다. 5세에 한글을 비롯하여 천자문을 깨우치고 외할머니에게 〈덜걱전〉·〈소대성전〉·〈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8세 때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대학≫·≪중용≫·≪맹자≫·≪고문진보≫ 등을 읽고,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근 동리에서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끼다가 11세 때인 1902년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었다.
이듬해 동학에 입도하여 천도교의 박찬명 대령 집에 기숙하며 서기일을 맡아보았다. 1905년에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일, 대성중학(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학비곤란으로 이해 11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으로부터 귀국하는 중 동경에 들러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메이지학원의 분위기에 따라 청교도적 생활을 흠모하게 되고 서양 선교사들의 성경 시간에서 익힌 기독교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홍명희(洪命熹)·문일평(文一平) 등과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소설·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09년 11월 7일에 〈노예 奴隷〉, 18일에 일문 〈사랑인가〉, 24일에 〈호 虎〉를 쓸 정도로 습작에 열중하였다. 그 해 12월에는 〈정육론 情育論〉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다. 1910년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이 해에 언문일치의 새 문장으로 된 단편 〈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다.
그 해 7월에 백혜순(白惠順)과 중매로 혼인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애정 없는 혼인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1912년 나라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으로 건강을 많이 상하였다. 오산학교 재직 때에는 톨스토이를 애호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진화론을 가르쳤다고 하여 교계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13년스토(Stowe,H.E.B.) 부인의 〈검둥이의 설움〉을 초역하여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시 〈말 듣거라〉를 ≪새별≫에 발표하였다. 그 해 11월 세계여행을 목적으로 상해에 들렀다가 1914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 新韓民報≫의 주필로 내정되어 도미하려고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귀국하였다.
김병로(金炳魯)·전영택(田榮澤)·신석우(申錫雨) 등과 교유하며 사상가 내지 교육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1915년 9월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한 뒤 이듬해 1916년 9월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북경으로 애정 도피를 떠났다. 그러나 11월 중순경 윌슨 미국 대통령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하였다.
상해에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쓰면서 안창호의 인도로 주요한(朱耀翰)·박현환 등과 독서·정좌·기도를 함으로써 수양 생활에 힘썼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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