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에 대한 편향된 기대, 문학에 대한 과소평가
최근 몇 년 간 독자들은 쏟아져 나오는 뇌과학 책들 사이를 걸으며 즐거움을 만끽해왔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뇌과학에 시선이 집중되다 보니, 뇌과학이 마치 인간의 의식에 얽힌 비밀을 모두 파헤쳐 줄 것처럼, 아니면 지금은 아니더라도 더 진보를 하면 유일한 해답을 보여줄 것처럼 생각하는 학자와 독자들이 늘어났다. 물론 부분적인 성과에 대해서는 기대가 크다. 그러나 뇌과학은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인간의 의식과 마음은 사실 뇌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들여다 볼 수 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뿐 아니라 뇌과학이 출현하기 훨씬 이전의 사람들도 가능했다. 특히 보통 사람들보다 조금 더 치밀하게 인간을 연구하느라 고심했던 이들은 그 도구를 제공해주었다. 바로 푸슈킨, 톨스토이, 프루스트, 괴테 같은 문학가들이 그러하다. 그들의 문학작품은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인간탐구보고서이다.
문학과 신경과학의 접점을 찾기 위해서
《뇌를 훔친 소설가》는 인간의 뇌에서 벌어지는 여러 신경과학적 메커니즘들이 옛 문학 속에서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지 파헤치는 책이다. 이 책의 저자 석영중 교수는 오랫동안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 대문호들의 작품과 삶을 연구해온 러시아 문학 전문가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문학과 신경과학의 접점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최근 <톨스토이와 신경과학> <도파민, 닥터 지바고의 글쓰기를 신경과학적으로 바라보는 한 가지 방법> 등의 논문을 발표했고. 드디어 첫 성과물, 《뇌를 훔친 소설가》를 펴냈다. 이 책에서는 러시아 문학뿐만 아니라 다른 언어권 문학작품까지 두루 살펴보면서, 그동안 단순히 예술로만 치부해온 문학 속에 감춰진 인간 뇌의 비밀을 파헤치고 있다.
뇌를 읽은 소설가들을 따라 뇌를 읽는 즐거움
예를 들어, 푸슈킨의 작품 속 여주인공 타티야나는 감정이입에 관여하는 ‘거울뉴런’의 작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1부 ‘흉내’). 요즘 흔한 말로 ‘글로 연애를 배운’ 타티야나는 자신이 읽은 소설 속 러브스토리를 현실 속 오네긴과의 사랑과 혼동하고 급기야 표절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오네긴이 떠난 순간 모방이 모방임을 알아차린 뒤 자신의 눈으로 삶을 만들어간다. 여기서는 바로 모방을 억제하는 ‘슈퍼거울뉴런’의 메커니즘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흔히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 이야기’의 주인공으로만 잘 알려진 닥터 지바고는 사실 자신의 온 삶을 통틀어 ‘시 쓰기’에 몰입한 인물이다(2부 ‘몰입’). 그가 사랑한 라라는 시적 영감에 다름 아니었다. 그는 가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예술로서 삶을 창조하는 것이라 믿었다. 극도의 몰입 상태에서 도파민이 주는 행복감과 의의를 이 작품은 잘 보여준다.
이 외에도 3부 ‘기억과 망각’에서는 감각과 회상의 연결고리를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속 마들렌을 통해 살펴보고, 애거서 크리스티는 어떻게 억압된 기억을 추리소설의 원동력으로 삼았는지 살펴본다. 4부 ‘변화’에서는 신경가소성을 평생학습으로 몸소 보여준 톨스토이와 고골의 삶을 들여다보고, 체호프가 진부한 삶에 대해 얼마나 역설적으로 비판했는지 보여준다.
뇌과학의 윤리적 문제에 절실히 필요한 문학 속 성찰
그러나 《뇌를 훔친 소설가》는 뇌과학적 메커니즘을 예고한 문학가들의 위대함을 극찬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 아니다. 저자 석영중은 서문에서 “문학 속에서 일종의 가정으로 진술되었던 내용들이 생물학적인 증거를 얻게 되고 인간 뇌 연구가 부딪히는 윤리적 문제들에 수천 년 동안 누적되어 온 문학 속의 지혜가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썼다. 과학의 시대 문학을 꼭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책은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한 당대 문학가들이 어떻게 모방범죄의 위험성을 경고했는지 보여주고(1부 ‘흉내’), 증오심의 중독이 파멸을 불러일으킨 《모비 딕》의 스토리를 통해 ‘몰입’에도 윤리가 필요함을 보여준다(2부 ‘몰입’). 소설 속 수천, 수만의 인물들이 보여주는 선과 악의 모습은 인간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사색의 장을 제공한다.
인간을 알기 위한 넘나들기는 계속된다
이제 막 인문학과 과학의 ‘넘나들기’는 시작되었다. 아직은 그 개념을 두고도 여러 가지 목소리가 공존하고, 서로 다른 입장에 따라 방향성을 제시하기 바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인문학자나 과학자나, 아니 독자들까지 끊임없이 더 나은 삶을 위해, 의미 있는 삶을 위해 인간에 대한 ‘앎’을 추구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뇌를 훔친 소설가》는 그 열린 시각의 시작점에서 유의미한 메시지를 던질 수 있기를, 앞으로 인문학과 과학의 대화가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책이다.
석영중
저자 석영중은 서울에서 태어나 고려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고려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러시아 시의 리듬》 《러시아 현대 시학》 《러시아 정교》 《톨스토이, 도덕에 미치다》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우리들》 《뿌쉬낀 문학작품집》 《벌거벗은 해》 《광기의 에메랄드》 《친구와의 서신 교환선》 등 여러 권이 있다. 2000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슈킨 메달을 받았으며 제40회 백상출판번역상을 수상했다. 최근에는 <톨스토이와 신경과학> <도파민, 닥터 지바고의 글쓰기를 신경과학적으로 바라보는 한 가지 방법> 등 문학과 신경과학을 접목시킨 논문들을 썼다. 또한 한국러시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프롤로그: 문학과 뇌
I 흉내
01 감정이입의 증거, 거울뉴런
02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아가씨
03 푸슈킨과 표절의 여왕
04 바이런 따라 하기
05 흉내 내기와 흉내 억제하기
06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07 유전이냐 환경이냐
08 창조성의 비밀
09 모방에서 감염으로
10 좋은 감염과 나쁜 감염
11 베르테르 열병을 앓는 사람들
12 어느 휴학생의 도끼 살인
13 흉내쟁이들을 위한 윤리
14 우리는 하나, 천국인가 지옥인가
II 몰입
01 뇌 속의 화학적 메신저
02 도파민이 주는 쾌감
03 사랑에 빠진 남자의 뇌
04 육체노동의 황홀경
05 닥터 지바고의 글쓰기
06 목적 없는 목적
07 모비 딕을 향한 복수 중독
08 몰입의 비극
09 윤리를 넘어서는 몰입
III 기억과 망각
01 기억, 인간의 조건
02 과거를 다시 경험하기
03 기억의 저장소 해마
04 프루스트표 마들렌
05 기억은 움직인다
06 잘못된 기억의 악몽
07 시인이 찾아가는 기억의 지하실
08 편도체와 정서기억
09 잠자는 살인을 깨워라
10 기억의 저주
11 불운한 기억의 천재 푸네스
12 잊어라
IV 변화
01 뇌는 얼마든지 변한다
02 런던의 택시 기사
03 뉴런들의 유유상종
04 왜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갈까
05 공부의 달인, 톨스토이
06 고골과 평생학습
07 변화의 가장 무서운 적, 범속성
08 위대한 게으름뱅이 오블로모프
09 체호프와 상자의 비유
10 습관의 감옥에 갇힌 사람들
11 전혀 귀엽지 않은 여인
12 일상과의 전쟁
13 낯익은 일상, 낯선 시선
14 문제는 균형이다
에필로그: 의미 있는 삶을 향하여
주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