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문학을 넘어서
새로운 문화 지층에서 펼쳐진 90년대의 한국 소설이 이전 소설의 전통을 여러 면에서 배신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그것에 곧바로 실패의 낙인을 찍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한국 소설이 전반적으로 허약해졌다는 점은 널리 인정된다. [미궁]의 말미에 실린 대담의 마무리를 하며 평론가 신철하는 ""이제 한국문학은 그 지리멸렬한 실존의 내면적 탐구나, 흐느끼는 듯한 여성 취향의 일상적 소재로부터 더 역동적이고, 더 선굵은 남성서사의 한편을 보여주어야 할 터닝포인트의 지점에 와 있는 것처럼 보인다""며 구광본의 [미궁]을 주목했다. ""2천년대의 벽두를 뒤흔들 만한 진지함과 진정성을 내장하고 있음에 틀림"" 없으며 ""그 가볍고 여성취향적인 내면화의 흔적들에 가새를 지르고 도약할 새로운 문학의 향도로서 [미궁]의 역할은 전혀 손색이 없다""는 것이다.
[미궁]은 오랜 작업을 거쳐 나왔다.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이 시작된 뒤 우리 소설에 80년대식의 거대 서사를 대체할 미시 서사가 언급되던 때 [미궁]은 첫 모습을 보였다. 7백장 분량으로 1992년에 발표된 그 동명의 작품을 일단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이번의 이 [미궁]은 내용이나 구성 그리고 분량 모든 면에서 단순한 개작의 성격을 넘어서 새로운 작품으로 집필되었다. 발표 당시 평론가 신범순의 「글쓰기의 최저낙원―새로운 소설들의 가능성」([문예중앙], 92년 가을호)과 그해 [오늘의 시] 하반기호의 특별좌담 「새로운 현실의 문학적 조건―패러디 패스티쉬 키치」 등을 통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작의와 실제 작품의 내적 성취 사이의 현격한 차를 진작부터 의식하였다. 이에 그동안 [미궁]이 가진 여러 문제성을 극대화하고 정교화하는 데 공을 들여 10년만에 마침내 우리 시대의 이상을 재탄생시킨 것이다.
거대 서사를 접고 미시 서사로 내달리면서 결국 실존적 내면과 여성 취향의 일상으로 경도된 90년대 한국 소설 전반의 흐름과는 달리 그동안 그는 더 거대한 쪽으로 나아갔다. 이런 점은 구광본이 포스트모던 작가로 분류되더라도 당시 그 부류의 작가들과 차별성을 가지게 할 것이다. 그동안의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많은 경우 그것이 멋진 치장품이거나 위급한 순간 내미는 방패일 뿐이었다는 혐의를 두고 있다""면서도 작가는 자신이 근대 극복의 한 방안으로 포스트모던 논의를 눈여겨 보았으며 어떤 부분을 흡수했다고, 대담에서 밝히고 있다. 또 [미궁]을 ""우리식 혹은 구광본식 탈근대 기획의 하나로 평가""받기를 바란다고도 밝혔다. 그의 거대 서사는 물론 80년대식의 그것이 아니라, 소설의 공간을 일상 및 경험 가능한 세계를 포함하여 신화적 세계로까지 넓히는 것이었다. 이번에 함께 나온, 넓게 보아 신화적 사고의 부활을 통해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 「소설의 미래」는 그런 면에서 [미궁]과 짝을 이루며 작가의 문학관을 집약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범어, 열세 개의 미로 혹은 고래뱃속
[미궁]은 여러 시대와 장소 그리고 온갖 텍스트가 뒤섞여 만들어진 세상(범어)에 얽혀든 서적외판원 이상이 현실 복귀를 위한 방황과 탐색을 하는 가운데 존재의 비밀을 깨닫는 한편 또 작가로서의 책무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그린 장편소설로, '최후의 모더니스트' 시인이자 작가였던 이상의 삶과 텍스트에 대한 단순 패러디를 넘어 그의 시대보다 훨씬 광대하고 복잡다단한 오늘의 세계를 미로의 주제에 맞추어 탐구하고 있다. [미궁]의 이상은 33세의 서적외판원이며, 작가지망생 김해경과는 약혼한 사이. 소설은 비 오는 출근길에 그가 택시와 함께 강물에 휩쓸린 뒤, 약혼녀의 친구라며 나타난 여자 마드모아젤을 따라가 범어시 유곽동 33번지, 일명 18가구라는 곳에 머물게 되는 상황에서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여러 시대와 장소 그리고 온갖 텍스트가 정교하게 뒤섞여 만들어진 도시 범어는 환상적이다. 그러나 그 '환상'은 현실과의 차이와 거리에서 발생하는 경이가 아니라 우리의 당면 현실 쪽으로 이끈다. 물에 빠지는 상징적인 죽음과 재생을 통해 이 또 다른 현실을 사는 그는 [날개]의 주인공이자 「오감도」의 새로운 주인공이 된다. 약혼녀의 죽음을 통보받고 유언까지 전해 듣게 되는 그 첫날 밤부터 이상한 기미를 보이던 33번지에서 오래지 않아 한 여자 엘르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 뒤 자살로 처리되는 사이 마침내 그는 현실 복귀를 위한 방황과 탐색을 시작한다. 그가 사후의 중유(中有) 세계 혹은 심령계가 아닐까 의심하던 도시 범어는 여러 시대가 중첩된 세계이다. 독자들은 그것이 ""1세기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동안 우리의 전통사회를 융단폭격하고, 초토화하다시피 한 근대화 과정""(김상훈)을 상징하는 공간임을 어렵지 않게 깨닫게 될 것이다.
이곳에서의 이상의 방황과 탐색은 곧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통과하는 일이며 상처를 치유하고 대안을 구상하는 일이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이곳에서 환속한 승려 출신 작가로의 변신을 강요당하는 그는 자신에게 소설과 화두라는 두 겹의 형벌이 씌워져 있음을 깨닫는다. 약혼녀가 지망한 작가의 길과 그녀의 작품노트에 기록된 화두(독 품은 복어 요리하기)가 고스란히 그의 삶으로 들러붙은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상황을 받아들이는 가운데 마드모아젤의 정부가 되며 또 그녀의 친구 로랑생으로부터 집요한 유혹을 받기도 하는 등 이곳의 삶에 깊이 얽혀들게 되고 그런 한편 삶과 죽음 그리고 섹스에 대한 앎을 일상 너머의 신비적 영역으로까지 넓혀간다.
홈바가 있는 세 평 반의 방에서 손님을 받는 마돈나, 쉬즈, 에꼴과 뒤에 미스 그랑 블루 선발대회를 거쳐 팔려 온 마리끌레르 등 33번지의 여자들. 이상과 함께 절에서 뛰쳐나왔다는 도원 스님과 하산길에 복어를 안주로 술을 마시다 쓰러진 그들을 간호한 간호사 마리. 복벽운동을 벌이는 '황태자' 장가택. 자신의 영혼에 의혹을 느껴 사서직을 버리고 성문 밖 광야로 떠나게 되는 우희웅 사서. 그리고 시도서관(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과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도서관)에서 재회한, 그의 건축기사 시절 동료로 사이버에로티커 사업을 추진하는 채 기사 등. 이상이 이들과 어울리면서 범어는 점차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범어(泛漁,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로는 泛魚)는 불모의 광야가 도시를 좁혀 들어오는 터라 성을 쌓아 그것을 막고 있는, 도시 곳곳에 비스듬하게 일어서 마주본 두 마리 물고기의 문양을 새겨, 두 마리 물고기가 물을 뿜어올릴 때 마침내 황폐함이 극복되리라는 소망을 담고 있는, 신화적 공간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상이 거주하던 유곽동과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던 범어시의 몇몇 장소는 8, 90년대 한국의 어떤 곳, 나아가 마르크스의 시대와 예수의 시대에 관련된 곳들로 사회·역사적 요소가 농후한 공간이다. 신화와 역사가 공존하는, 미로와도 같은 범어시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노력하는 동안 이상은 공산주의 혁명에 휩쓸리는 한편 예수의 수난극을 아주 가까이에서 지켜보게도 된다.
요하나(요한), 이사(예수), 탁마 스님 등의 도움으로 미궁의 중심점이라 할 화두에 접근해가는 동안 말세의식이 팽배해진 하늘교의 열심당과 마극사(마르크스)패가 결합하면서 도시 전체를 휩쓰는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이 와중에 그는 당국에 체포되어 지하감옥에 갇히게 된다. 경찰과 선이 닿아 있는 마드모아젤 덕분에 오래지 않아 풀려나지만 미스 그랑 블루 혹은 제1대 심청인 마리끌레르와 대덕도의 메트로 호텔에서 함께 보낸 하룻밤이 밝혀지면서 결별하게 된다. 이때 다른 구에 속한 33번지와 나인식스 클럽이 실제로는 하나임과, 이 두 곳을 비밀통로로 은밀하게 오가며 엘르를 죽였고, 이상을 유혹한 마드모아젤의 정체가 드러난다.
별개로 보이는 사건들에서 연관 관계를 발견하여 한 묶음으로 엮고 있는 것, 일례로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마르크스와 손을 잡고 혁명을 일으킨 일 등은 단순히 시대착오적 상상력에 의한 것일까? 작가는 그것이 전근대와 근대와 탈근대까지를 압축적으로 통과하면서 극심한 혼돈을 겪은 우리 사회와 시대를 그리기 위한 방법론임을 주장한다. 작가의 희망은 독자들이 이 혼돈의 인류학적 맥락까지 꿰뚫어보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시대와 예수의 시대를 뒤섞어 작가는 근대 서구의 한 전형, 나아가 서구화한 우리 사회의 축도 같은 것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다분히 불교적인 수행을 바탕으로 하여 미로를 빠져나가는 주인공을 내세워 관찰·비판하게 한 점에서 독자는 작가가 우리의 근대를 규정한 서구세계의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바를 어렵지 않게 짐작하게 된다.
유곽동 33번지 18가구에서 나온 얼마 뒤 소요사태의 마무리를 위한 하늘교와 당국의 기만적인 술책에 의해 이사가 십자가형에 처해진다. 이사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들이닥치는 태초의 혼돈. 다시 천지창조가 이뤄지고 이상은 탁마로부터 마지막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해 미로의 도시 범어가 스스로의 미혹에 의해 만들어진 것임을 깨닫는 이상은 거부했던 신의 소명을 고래뱃속에 갇힌 뒤 받아들인 선지자 요나처럼 작가의 책무를 받아들였다. 이어 범어의 여러 비극을 몰고 온 악의 근원을 향해 출발하면서 현실로 귀환한 그는 제1의 골목에서 제13의 골목까지 지나온 자신의 경험을 작품으로 쓰기 시작했고, 오랜 시간이 걸려 두툼한 책으로 묶였다. 그것이 바로 그의, 작가의, 우리의 [미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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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의 길목 - 비 오는 날 / 33번지 18가구
제2의 길목 - 유언 / 두 겹의 형벌 / 엘르는 왜?
제3의 길목 - 통속소설의 주인공 / 휴일의 사건 / 도서관과 몇 사람
제4의 길목 - 남해 / 섬 / 세례식 / 금서, 자동차 극장, 노천의회
제5의 길목 - 회당과 그 지하 감옥 / 비밀의 문 / 성문 밖
제6의 길목 - 동창생 / 지도, 3년차, 시한폭탄 / 숲속의 별장 / 방문객들, 섹스, 티스푼 사건
제7의 길목 - X축과 Y축 / 옛 도반 / 낯선 방
제8의 길목 - 최후의 만찬 / 두 권의 책 / 단절 / 범어의 유령
제9의 길목 - 성과 속 / 핫 라인 / 날개 / 쾌락의 체위
제10의 길목 - 노천의회 / 마극사패의 지하 아지트 / 체포, 감옥, 심문 / 서적외판원 K
제11의 길목 - 방조제를 걸어간 기억 / 마리끌레르와 보낸 밤 / 지옥 풍경
제12의 길목 - 최초의 악수 / 심판 / 수난 행렬
제13의 길목 - 성만찬 / 귀환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