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은 멀리 있는 것도 아니었다. 평양서도 공로(空路)로 세 시간 남짓하면 그곳 하늘로서 울연(鬱然)한 고층시가와 임립(林立)한 공장 굴뚝의 블라디보스토크를 ~nn높이 뜨니 가는 것 같지 않은데 잠깐 사이에 실개천같이 가늘어진 대동강 상류가 어느 산(山)갈피에 묻혀버리고 웅긋중긋 산봉우리들이 몰려들었다. nn원동(遠東)군단으로부터 내빈(來賓)도 맞아 오락(娛樂) 천막에서 정중한 기념식이 있었다. 이기영(李箕永) 씨의 개회사, 허정숙(許貞淑) 씨의 8·15기념보고, 폴소프 소장의 축사, 이찬(李燦) 씨의 기념시 낭독, 스탈린 대원수에게 메시지,~nn9월 11일. ‘아카데미’라거나 ‘한림원(翰林院)’이라거나 다 그전 청각으로는 관료적인 것이지만, 이 나라들엔 그럴 리 없다. 아르메니아 아카데미는 대극장 광장에 선 시인 ‘아보비앤’ 동상이 엇비슷이 보이는 길옆에 있었다.
호는 상허尙虛.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친척집을 전전하며 성장했다. 휘문고보 4학년 때 동맹 휴교 주모자로 퇴학당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1925년 도쿄에서 단편 <오몽녀>를 <조선문단>에 투고해 입선했다. 1927년 도쿄 조치대 예과를 중퇴한 후 귀국했다.
1929년 개벽사에 입사, 조선중앙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1933년 구인회에 참가했으며, 이후 1930년대 말까지 주로 남녀 간의 사랑과 심리를 다룬 작품을 발표했다. 1940년경 일제의 압력으로 친일 활동에 동원되었고, 1941년 모던 일본사가 주관하는 제2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했다. 1943년 절필 후 낙향했다가 해방을 맞아 서울로 올라왔다. 해방 공간에서 좌익 작가 단체에 가입해 주도적으로 활동, 1946년 <해방 전후>로 제1회 해방문학상을 수상하고 그해 여름에 월북했다. 6·25 전쟁 중엔 낙동강 전선까지 내려와 종군 활동을 했다. 1956년 구인회 활동과 사상성을 이유로 숙청당한 이후 정확한 행적은 알려진 바 없으며 사망 연도도 불확실하다.
1934년 첫 단편집 《달밤》 발간을 시작으로 한국 전쟁 이전까지 《까마귀》《이태준 단편선집》《이태준 단편집》《해방 전후》 등 단편집 7권과 《구원의 여상》《화관》《청춘 무성》《사상의 월야》 등 장편 13권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