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와 전설에 관한 것은 그만두고라도 고구려에서 건국 초기부터 국사를 기술한 ‘유기(留記)’라고 하는 1백 권이 있는데, 영양왕 11년(600)에 태학(太學)박사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유기’를 줄여서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고 하며, 백제에서는 근초고왕 30년(375)에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만들었다고 한다.nn세종 때에 ‘의방유취(醫方類聚)’ 365권(인쇄본은 266권)을 편찬하여 동방 의학의 집대성에 성공하였는데, 세조 때 이를 보완 확대하여 도서 전부를 포괄하는 고금의 거대한 여러 종류의 책을 만들기 위해 세조 9년(1464) 7월에 양성지(梁誠之), 임원준(任元濬)元濟) 등에게 여러 학문을 분류하여 부문마다 나이가 어린 문관 6명을 예속시켜 각각 전문 조사를 담당하게 하였다.nn옥편은 곧 자휘(字彙)(어휘), 자전(字典), 자감(字鑑) 같은 이름이 생기기 이전의 어느 사람이 잠시 쓴 하나의 자서(字書)인 특별한 이름이었습니다.nn조선에 관한 일본 문헌의 전반적 목록이 책으로 있음은 아직 모릅니다. 다만 사쿠라이 요시우키(櫻井義之)*가 편찬한 ‘명치연간 조선연구문헌지(明治年間朝鮮硏究文獻誌)’(421항, 1941, 소화 16년)에 그 이름에 해당한 도서 579종을 수록한 것이 일부분 정리 편찬한 것이다.
시인, 출판가, 문화운동가 등으로 활약하며 근대 초기 우리 문학 및 문화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대대로 잡과 합격자를 배출한 중인 집안의 영향 속에서 최남선은 어린 시절부터 신문명과 관련된 서적들을 접할 수 있었다. 독학으로 한글을 깨치고 7∼8세 무렵에는 한문을 배워 중국어로 번역된 신문명 서적을 읽었다. 13세가 되던 해인 1902년에는 경성학당에서 일본어를 배워 일본어로 된 신문과 잡지를 통해 서구의 근대 풍경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했다.
15세가 되던 해인 1904년 대한제국 황실유학생에 선발되었다. 일본 도쿄에 있는 동경부립제일중학교에서 유학했고 이듬해 집안 사정으로 인해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06년에 재차 일본 유학길에 올라 와세다 대학 지리역사과에서 공부했지만 1907년 3월 학업을 중단했다. 하지만 바로 돌아오지 않고 이듬해인 1908년 8월에 귀국했다. 약 2년 3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일본의 신문물, 특히 출판에 큰 자극을 받았다. 1908년 일본에서 인쇄 기구를 들여와 경성에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했다. 이 신문관에서 발간한 잡지가 한국 최초의 근대 잡지인 ≪소년≫이다. ≪소년≫이 한일강제합병 이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된 뒤에도 ≪붉은 저고리≫, ≪아이들 보이≫, ≪새별≫, ≪청춘≫ 등의 잡지 출판을 이어 갔다.
잡지 출판 외에 조선의 고서적을 발굴 출판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는 일본이 조선의 고서를 출판한 데 따른 충격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1911년 조선광문회를 설립하며 조선의 고서를 자주적으로 발굴하고 출판해 널리 보급하고자 했다. 일본 유학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조선적인 것’에 대한 탐구는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후에 단군에 대한 연구 등으로 확장되었다.
계몽운동에 대한 탐구와 조선적인 것에 대한 열망은 1919년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행동에 옮겨지기도 했다. 그는 당시 민족대표 33인 또는 민족대표 49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기미독립선언서>를 기초했다. 이에 최남선은 3.1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제에 의해 투옥되었다. 2년 8개월의 수감 기간 동안 최남선은 1920년대 자신이 추구할 작업의 기초를 다졌는데, 그것을 출감 후 <단군론>(1926), <불함문화론>(1927) 등으로 구현해 냈다. 이 작업들은 역사학과 민속학과 관련된 작업들이었는데 <심춘순례>, <백두산 근참기> 등의 현장 답사 기행문 등과 병행했다. 이는 조선적인 것의 기원을 찾으려는 일련의 작업들이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주간 잡지 ≪동명(東明)≫(1922)을 발행하고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창간하는 등 지속적인 출판운동을 펼쳤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민족 운동가로서의 면모는 1927년 변화의 양상을 맞이했다.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사편수위원회’에 참여하게 되면서부터 최남선은 친일 성향으로 변모했다. 일제의 기관지인 ≪매일신문≫에 적극 참여하고 중추원 참의를 지냈으며 1939년에는 만주국의 건국대학 교수로 재직하게 되었다.
해방을 맞이하고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발효되면서 최남선은 반민특위에 의해 체포되었다. 그러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지낸 수감생활은 짧았다. 그는 곧 보석으로 풀려났고 반민특위가 이승만 정부에 의해 무력화되면서 그의 친일행위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방기에서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에도 우리 역사에 대해 연구했으며 1951년 해군전시편실 고문을 지내고 1952년 육군대학에서 역사를 강의했다. 1955년 뇌일혈로 쓰러진 후 투병하다가 1957년 10월 10일, 향년 68세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