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전 세계의 작가들과 사상가들에게 영감을 준 위대한 작품, <그리스인 조르바></b>;<BR>;<BR>;“조르바는 삶을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 힌두교에서는 구루라고 부르고, 아토스 산의 수도승들은 아버지라고 부르는, 삶의 길잡이를 선택하라면 나는 틀림없이 조르바를 택할 것이다.” <BR>;<BR>;전 세계의 지성인들은 물론 작가들에게까지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작가로 평가 받는 사람, 니코스 카잔차키스. 위대한 대지의 역사가 그러하듯, 고귀한 인간의 삶이 그러하듯, 카잔차키스의 삶도 투쟁 그 자체였다. 철저하고 처절한 사유와, 자기 성찰과, 글쓰기와, 양심에 따른 행동. 카잔차키스는 위대한 작가일 뿐만 아니라, 경건한 구도자요, 행동가였으며, 진정한 세계인이었다. 그는 자신과 투쟁하고 신과 투쟁했으며, 불행에 처한 민족을 위해, 인간과 인류를 위해 투쟁하며 전 생애를 바쳤다. 그리고 그 작가의 인간애가 고스란히 담긴 결정체가 바로 <그리인 조르바>이다.<BR>;서구와는 사상의 기반과 풍토가 다른 우리나라에서도 지식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으로 첫 손가락에 꼽히는 작품 <그리인 조르바>. 카잔차키스가 실제 인물인 조르바를 모델로 쓴 <그리스인 조르바>는 더 이상의 수사가 필요없는 걸작이다. 어떤 사상에도, 어떤 종교에도, 어떤 지식에도 얽매이지 않고 인간의 본성과 자유를 기준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조르바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그리움이자 이상이다. 무한히 자유로운 생각과 거침없는 말투 그리고 본성에 충실한 그의 행동은 사실은 카잔차키스가 추구하는 인간, 즉 세상 어느 누구보다 경건하고, 도덕적이며, 선량하고, 진지하며, 진실로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BR>; <BR>;<b>;‘카잔차키스의 조르바’를 가장 조르바답게 되살린 번역</b>;<BR>;<BR>;말이든 행동이든, 위선적인 겉치레에 얽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 조르바. 특별히 이 책에서는 정직한 삶의 기운으로 충만한 조르바 특유의 생생하고 감칠맛 나는 어투를 우리말로 친근하고 생동감 있게 되살려냈다. <BR>;어느 때보다 따스한 위로와 새로운 힘이 필요한 때, 최선을 다해 삶을 사랑하고 자신의 모습에 충실하라고 웅변하는 조르바를 만난다면 그는 마치 친구처럼 다가와 어떤 환경에서든 인생을 사랑하고 즐길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1883년 2월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에서 태어나 1957년 10월 여행 피로증세로 독일의 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중 그동안 앓아오던 백혈병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02년 크레타에서 수도 아테네로 유학하여 아테네 대학의 법학과에 들어갔으나 곧 문학에 뜻을 두고 맹렬하게 문학 수업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1908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하여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지도를 받아가며 철학을 공부했는데 이때 프리드리히 니체도 함께 읽었다. 1910년 유학을 마치고 그리스로 돌아와 갈라테아 알렉시우를 아테네에서 만나 동거생활에 들어갔으며 1년 뒤에는 정식으로 결혼했다.
1914~1915년 그리스 시인 앙겔로스 시켈리아노스와 그리스 전역을 여행했다. 이 시절 일기에다 “나의 위대한 세 스승은 호메로스, 단테, 베르그송.”이라고 적었다. 그는 또 같은 일기장에다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의 열다섯 번째 칸토에 나오는 말 “인간은 어떻게 그 자신을 영원하게 만드는가.”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겠다고 적었다. 이 영원은 “물질(현세)을 넘어 정신(영원)으로”라는 카잔차키스 문학의 핵심을 보여주는 단어이다.
1919년 베니젤로스 총리에 의해 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어 카프카스에 볼셰비키에 의해 억류되어 있는 15만 명의 그리스인을 본국으로 송환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베니젤로스 총리가 1920년 11월의 총선에서 패배하자 카잔차키스는 장관직을 사임하고 파리로 건너가서 독일과 유럽 지역을 여행했다. 이때 카잔차키스는 여행과 꿈을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1924년에 아테네로 돌아와 엘레니 사미우를 만나는데 그녀는 나중에 그의 두 번째 부인 겸 작가 사후의 저작권자가 되는 여자이다. 이 당시 그리스 정치에 환멸을 느낀 카잔차키스는 소련으로 건너가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했으나 곧 그 사상과 결별했다. 1931년 그리스로 돌아와 아이기나 섬에 정착하고서 돈벌이를 위해 프랑스어-그리스어 사전을 편찬했다. 이 무렵 장편서사시 『오디세이아』를 쓰기 시작하여 1938년에 탈고하여 출판했다. 1930년대에는 영국, 스페인, 러시아, 일본과 중국, 모레아(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등을 널리 여행했으며 이때의 여행 소감과 인상들을 모두 해당 지역의 독립된 여행기로 출간했다.
1940년대 초반에는 그리스가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으면서 카잔차키스로서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기였으나, 대작 『그리스인 조르바』(1943)를 써냈다. 『그리스인 조르바』는 키프리오트 미할리스 카코야니스에 의해 1964년에 영화화되었고 세 개의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카잔차키스는 생전에 두 번(1951년과 1956년) 노벨상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을 하지는 못했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인 조르바』 이후에 『수난』(1948), 『미할리스 대장』(1950), 『최후의 유혹』(1951), 『성자 프란체스코』(1953) 등 네 편의 장편소설을 더 썼고 사망하기 1년 전에는 자전적인 『영혼의 자서전』을 썼다.
그리스인 조르바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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