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탄생한 목적은 아버지의 로망에 의하면 천 년 만에 나타날 희대의 영웅(당신 말이에요)을 돕기 위해서였어요.
저는 길고 긴 잠에 빠져 있다가, 혼란해진 인세를 구원할 용사님에 의해 멋지게 뽑힐 운명이었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숲 속 그루터기에 앉아 쉬고 있던 한 오크 같은 나무꾼님이 먼저 우악스레 저를 뽑아 버렸지 뭡니까?
그것도 잠든 지 딱 1년 만에 말이에요!
아니, 아직 채 소문도 퍼지지 않았을 텐데 그 산골 동굴까지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지금도 의문이라니까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지만 일단 ‘뽑은’ 인간을 주인으로 모셔야 하는 저로서는 별수 없었지요.
주인이 죽을 때까지 그의 언령에 구속되는 ‘검의 의식’이 이미 치러졌고, 또 인간의 삶이란 아주 찰나이니만큼 해방(?)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봉인되는 방법도 가능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저는 나무꾼님을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이 주인은 어찌 그리도 명이 질긴지, 몬스터한테 얻어터지고 절벽에서 떨어지고 구르고 뛰고 베이고 걷어차여도 끄떡없고 오히려 해가 지날수록 팔팔해지는 게 거의 오크 뺨치는 수준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핸섬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은 어찌 그리도 능글맞은지, 눈물로 지새운 밤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예요.
꼴에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우스갯소리로 남의 정신건강에 해를 끼치고도 좋다고 웃어댈 때면, 양 볼을 붙잡고 100포그 밖으로 순간이동 시켜 버리고 싶은 충동을 하루에도 수없이 느끼곤 했다니까요.
“어이, 세이! 뭐 하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저기 들어오네요.
손에 두둑한 돈주머니를 들고 있는 것을 보니 신전에서의 용무가 모두 끝난 모양이에요. 어째서인지 싱글벙글하네요?
또 술집에서 흥청망청 탕진해댈 생각인가? 훗, 두고 보자고요.
1987년 서울 출생.
시사주간지 기자로 재직 중 ‘무언가에 홀린 듯’ 퇴사하고 땅을 파고 있는 현직 백수.
〈제 5원소〉를 사랑하고 〈스타워즈〉 시리즈를 흠모하는 SF영화 매니아이며, 장르 문학에 빠지게 된 계기로는 고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어슐러 K. 르귄의 〈헤인(Hein)〉 연대기를 꼽는다.
활자로 즐거움을 제공하는 동시에 ‘책값이 아깝지 않다’라는 평을 듣는 것이 현재의 목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