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과 가족과 사회에 의해
죽어간 여인들을 위한 진혼곡
“죽음조차 존중받지 못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담아보고 싶었던 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점이었다. 실제로 조선 시대에는 죽은 자의 물건을 따로 정리해주는 직업이 없었다. 하지만 소설에서 다룬 사연들은 대부분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_작가의 말 중에서
조선 시대, 죽은 여인들을 위한 유품정리사가 있었다면? 장편소설 《유품정리사: 연꽃 죽음의 비밀》(이하 《유품정리사》)은 짧은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유품정리사’는 2000년대 초반 고독사가 늘어난 일본 사회에서 성장하며, 4차 산업시대의 신(新)직업군으로 꼽히는 직종이다. 정명섭 작가는 21세기 직업군을 18세기로 옮겨와 새로운 여성 서사 소설을 선보인다. 죽은 여인들의 지난 삶이 고스란히 담긴 유품을 대신 정리하는 유품정리사. 작가는 이러한 직업적 특성을 미스터리한 죽음의 비밀을 푸는 열쇠로 사용한다.
《유품정리사》가 지금까지의 역사소설과 다른 이유는 죽은 여인들의 이야기라는 데 있다. ‘과부’와 ‘열녀’라는 단어로 알 수 있는 남성에게 종속된 여자들의 삶, ‘계집’과 ‘여편네’라는 단어에 들어 있는 여성을 낮잡아 보는 사회적 인식. 소설 속 사건들은 과부와 열녀로 축약되는 여성의 삶과 계집과 여편네로 일컬어지는 여성들의 위치를 보여준다. 누군가는 일찍 죽은 남편에 대한 수절을 강요받고, 또 다른 누군가는 노름에 빠진 남편의 판돈을 대신해야 했다. 불공평한 사회구조 속에서 억울한 희생자가 되어야 했던 여성들의 이야기는 오늘날의 여러 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200여 년이 지난 시간 동안 많은 것이 변했지만 더 많은 것이 변해야 함을 이 소설은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유품정리사》에서 주인공 화연이 수습하고 정리하며 지켜봐야 했던 건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여성들의 삶에 대한 세상의 불공평한 관념이었을지도 모른다.
객주를 운영하던 방 여인, 열녀가 된 별당 아씨, 생계를 홀로 책임지는 김 소사…
그녀들이 남긴 물건들을 통해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다
《유품정리사》는 조선 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유품정리사가 된 화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유품에 남아 있는 삶의 흔적들을 통해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과정은 그간 정명섭 작가가 보여줬던 추리소설로서의 재미가 오롯이 녹아 있다. 여기에 여성을 대상화하는 사건들, 젠더의 역할과 정체성을 고착화시키는 사회, 피해자들이 가해자의 굴레를 쓰는 모순 등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뜨거운 메시지를 담았다.
역모 혐의로 의심받던 화연의 아버지가 죽었다. 목격자도 증거도 없는 사건, 포도청은 이를 자살로 마무리한다. 저잣거리에서는 임오화변의 가담자들을 숙청하려는 대비마마(혜경궁 홍씨)의 흑막이라는 흉흉한 소문이 떠돈다. 사건 이후, 화연의 어머니는 집안 살림을 정리하고 과천으로 내려가지만 화연은 끝내 한양에 남아 아버지 죽음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한다. 화연은 사건을 담당한 포교 완희를 찾아가 재수사를 요청하고, 완희는 수사에 대한 확답 대신 뜻밖의 제안을 한다.
“혹시 일해볼 생각 없소?”
“일이요?”
화연의 물음에 완희가 한숨을 쉬고는 입을 열었다.
“죽은 여인들의 시신과 유품을 수습하는 일입니다.” _ 본문 중에서
그렇게 화연은 몸종 곱분과 함께 죽은 여인들의 시신과 물건을 정리하는 대신,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된 기록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얻기로 한다.
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이 일을 하게 됐지만, 유품을 정리하면서 화연은 규방에서는 알지 못했던 세상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들은 왜 죽은 것일까? 그녀들은 왜 죽을 수밖에 없었을까? 화연의 물음이 커질수록, 여인들의 죽음 이면에 놓인 비밀은 아득하게 멀어져만 간다. 죽은 이들의 물건만으로 화연과 곱분은 죽음의 비밀을, 세상의 진실을 찾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화연의 아버지의 죽음 뒤에는 어떤 음모가 숨어 있는 것일까?
역사적 사건과 실제 사연들을 바탕으로
소설적 상상력을 더한 역사추리소설
“ (…) 임오화변은 전적으로 당시 임금인 영조 대왕의 뜻으로 이뤄졌네. 당연히 가담한 자들 역시 임금의 뜻을 따랐을 뿐이지. 하지만 사도세자의 아드님이 왕위에 올랐네. 그때의 가담자들은 임금의 아비를 죽인 천하의 역적이 되었고. 자네는 이 둘을 명백하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_본문 중에서
《유품정리사》를 이끌어나가는 사건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화연과 곱분이 유품을 정리하며 알게 되는 여인들의 이야기고, 또 다른 하나는 화연의 아버지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하는 임오화변 가담자 가족들의 목소리다.
화연의 아버지 장환길은 사도세자의 폐위 교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죽기 직전에는 역모를 꾸민다는 익명의 투서 때문에 근신 중이었다. 화연의 아버지뿐 아니라 임오화변에 가담한 자들은 제 자리를 보존하지 못했으며, 궐에서 쫓겨나 비명횡사하거나 행방이 묘연해졌다. 여인들의 죽음을 정리하는 화연과 곱분 앞에 창포검에 의해 죽음을 당한 이들의 사건과 녹색 도포의 비밀스러운 행적이 머문다. 당시 임금의 말을 따랐지만, 현재 임금의 아비를 죽인 데 동조한 셈이 된 이들과 그의 가족들. 그 억울함은 말 못 할 깊은 원한만을 새긴다. 그러던 어느 날, 화연과 곱분이 조사하던 여인들과 임오화변에 연루된 이들의 가족들까지 모두 사라지고야 만다.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 그리고 이후 왕위에 오르게 되는 정조. 소설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궁궐 밖 사람들의 시선으로 담아내어 저잣거리의 이야기꾼처럼 풀어낸다. 임오화변을 중심으로 한 거대한 음모와 여인들의 죽음. 유품정리사 화연은 이 모든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까?
1973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대기업 샐러리맨과 커피를 만드는 바리스타를 거쳐 현재는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글은 남들이 볼 수 없는 은밀하거나 사라진 공간을 얘기할 때 빛이 난다고 믿는다. 역사 추리소설 《적패》를 비롯해서 《김옥균을 죽여라》 《케이든 선》 《폐쇄구역 서울》 《좀비 제너레이션》 《명탐정의 탄생》 《조선변호사 왕실소송사건》 《별세계 사건부: 조선총독부 살인사건》 《체탐인: 조선스파이》 《달이 부서진 밤》 《유품정리사-연꽃 죽음의 비밀》 《한성 프리메이슨》 《미스 손탁》 등을 발표했다. 2013년 제1회 직지소설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NEW 크리에이터 상을 받았다. 《미스 손탁》이 2019년 원주 한 도시 한 책으로 선정되었다. 2019년 현재 한국 미스터리작가모임과 무경계 작가단에서 활동 중이다.
第一章 밤의 그림자
第二章 감춰진 이야기
第三章 짙어진 어둠 속의 달빛
第四章 푸른 비밀
終章 연꽃 위에 앉은 나비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