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의 그랜드마스터 어슐러 르 귄의 역사적인 첫 번째 에세이집
‘우리는 한낮의 햇살 속에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세계의 절반은 항상 어둠에 잠겨 있다. 그리고 판타지는 시처럼 밤의 언어로 말한다.’
장르문학의 그랜드마스터, 판타지와 SF의 대모로 불리는 어슐러 르 귄만큼 적극적으로 판타지와 SF의 가치를 옹호해온 사람도 드물 것이다. 폭포수처럼 쏟아낸 수많은 걸작 소설들은 말할 것도 없고 르 귄은 장르문학에 대한 사회의 편견을 깨기 위해 누구보다 가장 앞장서서 싸웠으며 장르문학의 게토 안에서 자위하는 팬덤을 향해 게토를 박차고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한다고 에세이와 강연을 통해 수없이 열정적으로 호소했다. 르 귄은 장르문학에 어울리지 않게 문학성이 있다는 이유로, 혹은 문학성을 추구한다는(혹은 하는 것 같이 보인다는) 이유로 순수문학계와 장르문학계 양쪽에서 의심의 눈길을 받아왔다. 르 귄의 작품들은 작가의 생전에 ‘탁월한 예술적, 역사적 가치로 영원히 보존되어야 할’ 미국문학의 정전 컬렉션인 Library of America에 네 권이나 등록되어 이미 미국문학의 위대한 유산으로 공인받았다. 그럼에도 르 귄은 단언한다. ‘나는 데뷔 이래 오직 판타지만을 써왔으며, 판타지와 SF라는 외우주가, 그리고 내륙의 땅이, 지금도 앞으로도 언제나 나의 조국이 될 것’이라고.
<밤의 언어>는 장르문학과 순문학의 경계를 타파하려 한 르 귄이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하던 70년대 후반에 발표한 첫 에세이집으로 르 귄이 장르문학에 대해 쓴 가장 중요한 에세이들이 모여 있으며 장르문학에 대한 작가의 한없는 애정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또한 <밤의 언어>는 장르문학을 다룬 에세이 중 아마도 가장 중요한 몇 권의 책으로 손꼽힐 만큼 장르문학의 역사에도 길이 남을 책이다.
“『오이디푸스 왕』도 꽤나 단순한 이야기다. 하지만 진부하지는 않다. 고개를 돌려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하고 심연을 들여다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다.” 르 귄은 위대한 판타지 문학은 신화와 전설이나 민담처럼 사실 꿈과 유사하다고 말한다. 판타지는 정신분석학과 마찬가지로 머릿속 무의식으로 떠나는 여행이다. 부동산과 월급과 골프와 명품 가방이 한낮의 세계라면 판타지는 그러한 절반의 삶이 아닌 다른 절반의 삶을 다룬다.
판타지는 현실도피이다. 왜 아니겠는가. 하지만 그 현실도피에 바로 판타지의 영광이 존재한다. 판타지의 현실도피는 진실을 말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판타지는 한 영혼이 성장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현실도피다. 주식 시세표에 몰두하고, 소유와 유행에 민감하고, 악을 직면하지 않고 ‘문제’로 여기는 태도야말로 나쁜 의미의 현실도피다. 판타지는 여행이고 성장이다. 진정한 판타지는 신화가 그러듯이 한 인간의 진정한 성숙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나는 성숙이란 껍질을 깨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성장해서 도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아이가 죽고 어른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살아남아 어른이 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은 왜 현실적이지 않은 신화에 매혹될까. 그것이 현실은 아니라도 진실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걸 알고 있다. 어른들도 알고 있으며, 바로 그 때문에 판타지를 두려워한다. 어른들은 판타지 속의 진실이 모든 거짓에, 모든 허상에, 자신의 삶 속으로 파고 들어온 온갖 불필요하고 사소한 것들에 도전하고 심지어 위협하기까지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유가 두렵기 때문에 드래곤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진실을 대면하지 않고 우리는 성장할 수 없다. 그건 아이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선과 악에 대해 완벽하게 솔직하고 사실 그대로 말하려면 결국 우리는 자기 자신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내면, 가장 깊은 심연 속의 자신을. 거짓 희망의 부추김을 받거나, 두려움에 사로잡혀 응석받이가 되면 한 인간의 성장은 정체되고 왜곡될 수밖에 없다. 한낮의 햇살 속에 드러난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밤하늘의 영롱한 별들이 나타날 때 등장하는 새로운 세상, 밤의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을 우리는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 우리는 육체와 정신을 지닌, 이성과 꿈을 동시에 지닌 인간으로서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밤의 언어>는 르 귄의 작품세계에 경의를 바쳐왔던 팬들을 위해서 큰 의미가 있는 책이겠지만 르 귄의 작품세계에 친숙하지 않았던 독자들도 편하게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는 책이다. 낄낄거리는 가운데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책이다. 작품들만큼이나 신나고 유쾌하게 만드는 르 귄의 재치 있는 글들은 삶은 반추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런 기교는 르 귄만한 그랜드마스터에게만 가능한 신기일 것이다.
1929년 10월 21일, 저명한 인류학자 앨프리드 크로버와 대학에서 심리학과 인류학을 공부한 작가 시어도라 크로버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제 관계였던 부부는 현장 연구를 함께하고 북미 최후의 야생 인디언으로 알려진 이시를 곁에서 도우며 기록을 남기는 등 아메리카 인디언 연구에 큰 족적을 남겼고, 이들의 풍부한 경험과 지식은 르 귄의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래드클리프 컬리지에서 프랑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학을 전공한 어슐러 르 귄은 이후 컬럼비아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풀브라이트 장학생으로 선발된 그녀는 박사 과정을 밟기 위해 1953년 프랑스로 건너가던 중 역사학자 찰스 르 귄을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몇 달 후 파리에서 결혼했다. 1959년, 남편의 포틀랜드 대학 교수 임용을 계기로 르 귄은 미국으로 돌아와 오리건 주의 포틀랜드에 정착하게 되었다.
시간여행을 다룬 로맨틱한 단편 「파리의 4월」(1962)을 잡지에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르 귄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보이며 '어스시 시리즈'와 '헤인 우주 시리즈'로 대표되는 환상적이고 독특한 작품 세계를 구축해 냈다. 인류학과 심리학, 도교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녀의 작품은 단순히 외계로서 우주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다른 환경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문화를 깊이 있게 파고들어 일종의 사고 실험과 같은 느낌을 주며 독자와 평단의 사랑을 받았다. 휴고 상, 네뷸러 상, 로커스 상, 세계환상소설상 등 유서 깊은 문학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였고 2003년에는 미국 SF 판타지 작가 협회의 그랜드마스터로 선정되었다. 또한 소설뿐 아니라 시, 평론, 수필, 동화, 각본, 번역, 편집과 강연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며 2014년에는 전미 도서상 공로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 88세의 나이로 포틀랜드의 자택에서 영면하였다.
서문
전미 도서상 수락 연설
몬다스의 시민
꿈은 스스로를 설명해야 한다
엘프랜드에서 포킵시까지
도주로
주시하는 눈
미국인은 왜 드래곤을 두려워하는가?
아이와 그림자
미국의 SF와 타자
돌도끼와 사향소
『변화한 나: SF와의 조우』 머리말 (발췌)
SF 속의 신화와 원형
SF와 브라운 부인
젠더는 필요한가?
겸허한 사람
『어둠의 왼손』 머리말
『로캐넌의 세계』 머리말
『세상을 가리키는 말은 숲』 머리말
자가 제작 우주관
영혼의 스탈린
『유배 행성』 머리말
『환영의 도시』 머리말
『어느 늙은 유인원의 별 노래』 머리말
글쓰기에 관하여
해설 수잔 우드
옮긴이의 말